최주형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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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우곡리 469-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兵 領率將 崔公 珠衡 殉國記念碑(의병 영솔장 최공 주형 순국기념비)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서 태평성세를 만나게 되며는 국리민복이 되게 정치를 하는 것이요. 위급할 때를 당하게 되며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살신성인하여 절의를 세우는 것이다. 내가 일찌기 한말의 의병 (영솔장)인 최주형 공에 대하여 옷깃을 여미고 경앙하여 왔었다. 공은 고종 병자 서기 1875년 11월 13일에 영덕 도계동에서 나시니 나조 문창후 고운 선생의 후예요 병주의 아드님이시다. 얼굴이 준수하고 담력이 활달하여서 어릴때 부
터 모든 것이 비범하고 학문을 연수함에 있어서 유달리 병서를 좋아하였다. 국운이 기울어짐에 왜적이 1904년에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란 것을 빙자해서 침략하기 시작했다. 국내 각지에서 피끓는 청년남녀가 봉기하여 적을 대항하게 됨에 동해안을 담당한 우리 고울의 의병대장인 신돌석 장군이 기치를 높이 들고 의병을 모았다. 공이 달려가서 장군을 뵙고 전략을 의논하니 심복으로 믿고 영솔장에 임명하게 되니 공은 더욱 감격하여 결사 혈맹하였다. 익년 여름에 장군의 명을 받아 통곡 아곡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바야흐로 출격하려는 즈음에 적의 무리가 밤을 타고 다가와서 사면으로 공격하니 포연탄우 속에 아군은 여존자가 수십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결사고투를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흉탄에 의하여 순국하시니 때는 1907년 무신 6월 26일이었다. 시체를 걷우어 도계동 절골 앞산 신좌동에 안장을 하게 되니 향년이 겨우 33세였다. 부인은 평산신씨니 치회의 따님으로서 1남 3녀를 낳으니 남은 낙기요 여는 남홍진과 박종범과 남성진에서 각각 출가하였다. 아! 공의 위국충절은 지난날 고인에 비하여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또한 닥아오는 앞날에 있어서도 빛나는 모범이 될 것이다. 공의 종질 윤기가 나에게 비명을 청탁하기에 어찌 굳이 거절할 수 있으랴. 다만 위와 같이 그 전말을 개술하고 이어서 명을 하노니
명에 왈
절의는 태산보다 무거운 것이요 생명은 홍모보다 가벼운 것이다. 영특한 얼과 굳센 넋은 하늘에 오르고 땅에 내리기도 할 것이다. 때로는 풍운과 우뢰가 되고 때로는 금석과 서옥이 되어서 기리 빛나리라.
200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 수령함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안장
파평 윤병문 삼가 글을 짓고 진성 이광식 삼가 글씨를 씀
단기 4319년 서기 1986년 병인 월 일 손 두진 석우 근수
가선대부 경주부윤 경주최공 중능 배 숙부인 성주이씨 제단 / 조봉대부 이조정랑 경주최공 몽절 배 정부인 전주이씨 제단 / 진사 경주최공 남원 배 의인 성주이씨 제단
자헌대부 증 호조판서 경주최공 섬 배 정경부인 안동권씨 제단 / 강릉부사 이조판서 경주최공 유 배 정경부인 광산김씨 제단 / 문과 경주최공 명흥 배 공인 광산김씨 제단
경북 영덕군 영덕읍 우곡리 469-1 의병 영솔장 최공 주형 순국 기념비를 찾아왔다.
義兵 領率將 崔公(珠衡) 殉國記念碑(의병 영솔장 최공(주형) 순국기념비)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ㅇ 관리번호: 33-1-44
ㅇ 관리자 : 경주최씨 영덕읍 우곡문중 최석우
ㅇ 시설내용
- 건립일자 : 1986년 11월
- 시설규모: 부지 188㎡ 탑신 70㎝ 제단 230㎝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서 태평세대를 만나게 되면 국리민복(國利民福)이 되게 정치를 하는 것이요. 나라가 위급할 때를 당하게 되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하여 절의(節義)를 세우는 것이다.
공은 1875년 11월 13일 영덕군 지품면 도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성근(聖根)이며, 경주인(慶州人)으로서 신라 문창후(최치원)의 후예요. 병주(柄柱)의 아들이다.
1904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이후 외적이 침략하기 시작했다. 국내 각처에서 피끓는 청년 남·녀가 봉기하여 적을 대향하게 되었으며, 동해안을 담당한 우리 고장의 의병 대장인 신돌석 장군이 기치를 높이 들고 의병을 모았다. 공이 달려가 장군을 뵙고 전략을 의논하니 영솔장에 임명하였다. 영양, 진보, 청송, 울진, 평해, 영해, 영덕 등 많은 지역에서 외적과 전투를 하였으며, 장군의 명을 받아 병곡면(柄谷面) 아곡리(牙谷里)에 진지를 구축하고 바야흐로 출전하려는 즈음에 적의 무리가 밤을 타고 다가와서 사면으로 공격하니 포연탄우(砲煙彈甫) 속에 아군은 생존자가 수십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가지 결사고투(決死苦鬪)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마침내 적의 흉탄에 의하여 1907년 6월 26일 순국하시니 향년 겨우 33세였다.
이와 같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 산화하신 순국선열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장군의 유가족이 중심이 되어 성금을 모아 순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도 최주형 영솔장의 항일 의병 구국정신을 기리어 2001년 8월 15일 제56주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하였으며, 2002년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義兵 領率將 崔公 珠衡 殉國記念碑(의병 영솔장 최공 주형 순국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