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우천면 법주리 321-3(산31)
- 탐방로그
- 순국열사 강승문의 묘를 찾기 위해 횡성군 우천면 법주리 321-3(산31) 바리골에 왔다. 강승문의 본명은 강성순이다. 묘비에는 그의 본명이 새겨져 있으나 공훈록에는 본명이 아닌 강승문으로 등재되어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강승문(강성순) 선생의 묘소를 찾아 횡성군 우천면 법주리 321-3(산31) 바리골에 왔다.
殉國烈士 晉州姜公 聲順 之墓(순국열사 진주강공 성순 지묘)
공의 휘는 성순이요 자는 사윤이시니 본관은 진주요 성은 강씨이시다. 시조 고구려 명장이신 원수공 휘 이무이시며 세손 박사공 휘 계용의 7세손 통정공 휘 회백으로 1자가 장령공 휘 종덕이라 이분의 1자이신 군수공 후 자신의 12세손 휘 유 호 상곡은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내셨으니 공은 13세손으로 갑오년에 부친 휘 조원과 모친 해주오씨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 인생의 삶을 다하지 못한채 젊은 나이로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이시다. 공의 조고 휘는 대완 신해년 7월 13일 좋하시고 조비 영월신씨는 정해7월 2일 졸하시니 묘는 정암 지간곡에 계시다. 고 휘는 조원이시니 무진생 계유3월 10일에 졸하시고 비 해주오씨는 계미12월 24일에 졸하셨으니 묘는 법주리 유서에 안장하셨다. 배는 청주한씨로 1990년 6월 16일에 졸하셨다.
공은 시대적으로 춥고 배고픈 그리고 자유마저 빼앗긴 일제통치하의 억압된 세파속에서 나라 잃은 설음을 금할길 없는 세상을 살으셨다. 각지에서 독립을 위한 독립선언서가 배부되고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을때 공이 살고 계신 횡성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차로 기미년 2월 27일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2차로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있기까지 공은 동분서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을 넘고 강을 건느며 굶주린 배를 움켜집으며 사랑하는 조국의 자유독립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셨던 어른이시다. 더구나 횡성의 3.1운동은 천도교회에의해 추진되었던바 공도 천도교인이셨던것이다. 공은 최종하 윤태환 탁영재 전성수 최동수등 십수명과 함께 추진 그 활략이 다대한것으로 횡성과 3.1운동이란 책에 수록돼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공이 서거하신 3월 1일 만세운동은 13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의기는 대단하였을 것이리라. 나라 잃은 백성들은 일본군의 군화발과 말굽에 밟힌지 수십년 동안 고생과 역경을 이겨내며 참아왔던 백의민족의 운동이야말로 조국없는 백성은 없고 백성없는 나라는 없다는 말과 같이 징용을 끌려가기위함이 아니라 잃었던 나라을 찾기위함이요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한맺힌 투쟁이였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공은 뜻을 다 이루지 못한채 비명에 가셨지만 후손들의 평온한 삶을 영위케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던 것이다. 그르기에 오늘 우리 후손들은 이렇게 서광하지 않은가? 길이 후손에 물려줄 기상이요 영원한 빛이요 만대에 별이 되시리라! 고이 평안하옵소서
공의 묘는 백자동에서 서기 1989년 11월 1일 바리골로 이장 건좌
서기 1989년 11월 1일 수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공은 뜻을 다 이루지 못한채 비명에 가셨지만 후손들의 평온한 삶을 영위케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던 것이다. 그르기에 오늘 우리 후손들은 이렇게 서광하지 않은가? 길이 후손에 물려줄 기상이요 영원한 빛이요 만대에 별이 되시리라! 고이 평안하옵소서
공의 묘는 백자동에서 서기 1989년 11월 1일 바리골로 이장 건좌
서기 1989년 11월 1일 수
사자 인구, 장손 병철 병춘
증손 영묵 도엽, 현손 교식
증손 영묵 도엽, 현손 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