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락 집(백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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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57
탐방로그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57에 위치한 백하구려(白下舊廬)를 찾았다. 이곳은 백하 김대락 선생의 생가로 1909년부터 1910년까지 협동학교 교사로 활용된 곳이다. 김대락 선생의 손자 되시는 분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김대락 선생은 중국에서 돌아가셨고 일본군의 만행을 피해서 묘소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후에 몇 번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국내의 뜻있는 유림에서 나무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서 가묘를 이곳 천전리 선산에 만들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산이 깊어서 안내자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백하구려는 김대락지사의 생가이고, 모두 7남매의 맏이이시다. 조카 김만식,김정식,김규식,김병식,김만식가 독립유공자이고, 김규식의 아들 김성락이 독립유공자이시다. 여동생 김우락여사는 석주 이상룡의 부인으로 독립유공자이시고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손자며느리 허은 모두가 독립유공자이시다. 막내 여동생 김락여사는 기암 이중업의 부인으로 부부 모두 독립유공자이시고,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 아들 이동흠,이종흠, 사위 김용환 모두독립유공자 이시다.
백하구려(白下舊慮)
기념물 제137호이기도 한 이 건물은 김대락과 그 후손들이 세운 독립운동의 공적을 알리기 위해 2008년 5월 9일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김대락은 1907년 내앞마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설립되자 처음에는로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1909년 초에 이르러 신교육을 수용하여 백하구려를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변화는 안동은 물론 영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나라가 망하던 1910년, 김대락은 마을과 인근의 청장년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한인들을 지도하고,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하다 1914년 12월 삼원포 남산에서 작고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뜻은 여동생인 김락, 집안 조카 김만식, 김정식, 김규식, 종손자 김성로의 항일투쟁으로 계승되어 나갔다. 나라에서는 이들의 우뚝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유공자로 포상하고, 백하구려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白下舊廬(백하구려)
안동시 임하면 천전1리 257 백하구려(白下舊廬)를 찾아가야 한다.
이곳은 백하 김대락의 생가로 1909년부터 1910년까지 협동학교 교사로 활용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