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설 철관(안동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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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4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협동학교
광복회
6.10만세운동(1926)의 주역 권오설(1897~1930)! 철관에 갇히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청산리전투와 간도참변
안동 갑오의병.
안동을 '한국독립운동의 발상지'라고 일컫는 이유는 1894년 갑오의병의 방상지이기 때문이다. 갑오의병은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국권을 침해한 갑오변란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한말 의병사에서 그 첫머리를 장식한 투쟁이자, 한국독립운동사의 출발점이다. 안동 갑오의병은 서상철의 발의로 1894년 시작되었다. 8월에는 그 규모가 2,000명으로 확대되었으며, 9월에는 상주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였다.

안동 을미의병.
갑오의병에 이어 1895년 12월(양력 1986년 1월)에 안동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안동에는 두개의 의병부개다 조직되었는데, 안동부의 안동의진과 예안의 선성의진이다. 안동의진은 정재 류치명의 학통을 이은 유림들이 주도하였다. 권세연,김도화,김홍탁등이 대표적인 의병지도자이다. 안동의진은 1896년 3월 말 경북북부지역의 여러 의병,제천의병 별동대와 연합하고, 상주 태봉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예안의진. 예안의 의병항쟁은 1896년 1월 거병하여 9월까지 전개되었다. 이 기간동안 예안의진은 4차례나 재결성되고, 태봉전투를 비롯한 예안 인근지역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퇴계종택, 오산당, 삼백당등이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안동의 자정순국자.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전국에서 죽음으로 저항하는 순국자가 줄을 이었다. 자정순국은 자결을 통해 국민들에게 민족적 각성과 항일투쟁을 촉구하였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의가 크다. 1905~1910년에 걸쳐 전국에서 70명 정도의 인사들이 자정순국의 길을 택하였다. 이 가운데 안동인이 10명이나 되고, 이 수치는 전국에서 가장 많다. 특히 다수의 안동인들은 자결의 방법으로 단식을 택하였는데, 이것이 주변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는 義를 소중하게 여긴 안동 유림들의 결연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정순국이란? 자정순국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극단적인 저항의 방법이다. 1905년 박제순-하야지 강제합의(을사조약)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 나라를 잃게되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자정순국의 길을 선택하였다. 자정순국자들은 임금의 신하와 백성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은 것이다. 이는 불고대천의 원수인 일본의 국민으로는 살 수 없다는 의지이기도하다. 안동인들은 이러한 의리론에 입각하여 자정순국의 길을 선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