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일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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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293
탐방로그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293에 위치한 순국열사 추산 권기일 선생 기념비를 찾았다. 권기일 선생 순국기념비 옆에는 부인 되시는 김성 선생 묘도 함께 찾을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추산 권기일 선생 순국 기념비

여기 대곡마을은 꺼져 가는 민족의 숨결을 되살리는 데 몸 바친 추산 權寄鎰(권기일) 1886∼1920)선생이 나실 곳이다. 안동권씨 副正公派(부정공파)의 후예인 선생은 可徵(가징)공 이후 10대째 맏집을 이은 胄孫(주손)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부친 洙道(수도)공과 모친을 여의고, 조부 憲鳳(헌봉: 통훈대부 사근도참판)공의 가르침 속에 성장하였다. 1910년 나라를 잃자 안동의 애국지사들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먼길을 떠났고, 선생도 그 길을 택하였다. 가슴에 타오르는 민족사랑의 열기가 그를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부모를 남겨준 채 가족을 이끌고 1912년 3월 먼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에 도착한 선생은 이상룡 김동삼을 비롯한 선배들이 결성한 정학사에 합류하였고,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의 지역대표일 區正(구정)과 교육회 위원으로 활등하면서 독립전쟁의 바탕이 되는 동포사회를 유지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독립자금을 수송하다가 1917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지만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렇게 키워낸 독립군이 봉오동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1920년에 일본군이 동포사회를 짓밟으니, 경신참변이라 부른다. 그 와중에 선생도 1920년 8월 15일 길림성 유하혈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으니, 망명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나라를 되찾으려 35세 젊음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추산선생!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숨결 이 배어 있는 이 마을에 돌을 세우노니 모두 옷깃을 여이고 귀 기울여 보라. 민족적 양심과 역사적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선생은 지금도 깨우치고 계시리니.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293 순국열사 추산 권기일선생 기념비를 찾아가고 있다.
추산 권기일 선생 순국 기념비
여기 대곡마을은 꺼져 가는 민족의 숨결을 되살리는 데 몸 바친 추산 權寄鎰(권기일) 1886∼1920)선생이 나실 곳이다. 안동권씨 副正公派(부정공파)의 후예인 선생은 可徵(가징)공 이후 10대째 맏집을 이은 胄孫(주손)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부친 洙道(수도)공과 모친을 여의고, 조부 憲鳳(헌봉: 통훈대부 사근도참판)공의 가르침 속에 성장하였다. 1910년 나라를 잃자 안동의 애국지사들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먼길을 떠났고, 선생도 그 길을 택하였다. 가슴에 타오르는 민족사랑의 열기가 그를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부모를 남겨준 채 가족을 이끌고 1912년 3월 먼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에 도착한 선생은 이상룡 김동삼을 비롯한 선배들이 결성한 정학사에 합류하였고,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의 지역대표일 區正(구정)과 교육회 위원으로 활등하면서 독립전쟁의 바탕이 되는 동포사회를 유지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독립자금을 수송하다가 1917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지만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렇게 키워낸 독립군이 봉오동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1920년에 일본군이 동포사회를 짓밟으니, 경신참변이라 부른다. 그 와중에 선생도 1920년 8월 15일 길림성 유하혈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으니, 망명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나라를 되찾으려 35세 젊음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추산선생!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숨결 이 배어 있는 이 마을에 돌을 세우노니 모두 옷깃을 여이고 귀 기울여 보라. 민족적 양심과 역사적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선생은 지금도 깨우치고 계시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