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남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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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개곡리 229
탐방로그
경북 안동시 남후면 개곡리 229에 위치한 황영남 지사 순국기념비를 찾았다. 이 비는 1919년 일제에 맞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황영남 지사의 애국충절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 비는 일본제국이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고 식민통치를 자행하던 1919년 일제에 맞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황영남 지사의 애국충절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이다. 황영남 지사는 평해황씨 검교공 26세손으로 1875년 3월 4일 경상북도 안동군 남후면 개곡동 301번지에서 황성근 선생과 안동김순임 여사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사께서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여 일찍이 정승호 의숙에서 한학을 공부 하였으며 남다른 정의감으로 자신의 입신양명보다는 불우한 이웃 돕기와 지역발전등 구국의 일념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셨다. 남후면 일대 농민들의 숙원 사업이었던 암산보 축조시 육중한 돌덩이를 옮기지 못하여 공사 진척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십리길을 달려가 아무런 대가 없이 혼자 힘으로 돌을 옮기고 쌓아 수개월간의 공사를 앞당겨 완공토록 하였다. 말을 타고가던 권세가
나 지주들이 수레를 끌고가는 농민들에게 길을 양보하지 않을 때에는 말다리를 부러뜨려 질타하는 등 신분사상 철폐에도 앞장서 왔다. 훗날 개곡동마을앞 길이 말뚝이라 불리게 된것은 권세가들에 대한 응징이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데 연유 하였다고 한다. 1910년 8월 22일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합병하고 총칼로 무장한 헌병과 경찰을 주둔시켜 우리 동포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자 애국충절에 불타던 지사께서는 김옥진 권두경 이암회 권도익 김필수 등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비밀리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일본경찰이 주둔하고 있는 군내 각 면사무소를 수차에 걸쳐 기습공격을 하는등 일제의 만행에 앞장서 저항하여 한민족의 기개를 드높혔으며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사의 쾌거인 3.1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자 김병우 김원진 유동붕 이상동 임찬일 강대극 문우석 박진성 동지들과 태극기와 전단을 만들어 군내 각 리.동에 배포하고 3월 18일을 기하여 군민들을 동문통은 견항천 예안통은 목성산 영주,풍천통은 서당골산 대구통은 영호루에 집결토록 하여 1시에 만세시위를 전개키로 결의하였다. 지사께서는 대구통의 남선, 남후, 일식 등 3개면의 조직책임을 맡아 수백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3월 23일에는 영호루에 500여명을 재집결시켜 경찰서를 향하여 2차시위를 주도 하시다가 일제관헌들이 미친듯이 휘두르는 총칼에 머리와 배 등을 무참하게 찔려 현장에서 쓰러진후 동지들에 의하여 간신히 구출되어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조국광복의 한을 풀지 못한체 다음날인 3월 24일 44세를 일기로 거룩한 목숨을 거두었으니 이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리요. 그러나 일제의 강압통치 아래서 자손들에게 미칠화를 염려하여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한 나머지 기록이나 증거물이 보전되지 못하여 묻혀진 사실로 전해 오다가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정부로부터 지사의 숭고한 멸사봉공의 항일독립운동업적을 인정받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으시니 늦게나마 지사의 영혼이라도 위로하게 되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사께서는 슬하에 병우 병주 병홍 병인 병준 5형제와 2녀를 두셨으나 모두 선친의 영예스러운 훈장추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체 고인이 되었으니 이 또한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에 지사의 손자들이 조부님의 투철하신 멸사봉공정신을 자손만대에 길이 계승토록 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세운다.

단기 4332년 기묘 8월 일
경북 안동시 남후면 개곡리 229 황영남 지사 순국기념비를 찾아왔다.
황영남 지사 순국 기념비

이 비는 1919년 일제에 맞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황영남 지사의 애국충절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황 지사는 1875년 3월 4일 고종 을해년생으로 젊은 시절 불우한 이웃돕기와 지역발절에 앞장섰고 신분차별 철폐운동에도 헌신했다. 일제가 1910년 한반도를 강제로 합병하자 김옥진, 권두경, 이암회 선생 등 10여명과 비밀 결사대를 조직해 일본 경찰들의 주둔지를 수차례 습격했으며 민족사의 쾌거인 3.1운동이 전개되자 남후면과 남선면, 일직면 등 3개 면의 조직 책임을 맡아 1919년 3월 18일 수백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3월 23일에는 시위대 500여명을 인솔해 안동시 영호루에서 안동경찰서 쪽으로 진격하다 항일운동 지도부 살해지시를 받은 일제 관원들이 휘두른 총칼에 온몸을 난자당해 쓰러진 뒤 하루 만에 44세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황 지사의 숭고한 멸사봉공의 업적을 인정해 광복 50주년인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병선 황영남지사 순국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