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693-2
- 탐방로그
-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693-2에 위치한 애국지사 백아 이정기 선생 추모비를 찾았다. 이정기 선생 추모비 옆에는 해당 비석의 건립기도 함께 찾아볼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 유가의 훈도를 몸에 익혀 품행이 단정신중하고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며 풍모 또한 출중하여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촉망과 기대를 모았었다. 지사께서는 1910년 국욕적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상실되어 민족이 논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20대의 젊은 나이에로 분연히 일어나 국권회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지셨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돌아와 향민들을 독려 운동에 앞장섰을뿐만 아니라 일제의 만행과 한민족의 강렬한 독립의지를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하는 유림 대표 독립청원서 서명사건(파리장서사건)에 일우 곽종석 회당 장석영 조부 면와 이덕후 오봉 성대제 공산 송준필 심산 김창숙선생과 함께 최연소로 적극참여하셨고 민족시인 이육사를 의열단에 권유입단케 하고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형우 배병현 고모부 김정훈등 현지의 많은 애국지사들과 연계투쟁하셨다. 또한 장진홍 의사와 함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셨다. 슬하에는 배 성봉선과의 사이에 장녀 종규를 두었고 상배후 배 김수현과의 사이에 장남 종걸 차녀 종령 남매와 손자 승호를 두었다. 그러나 선생께서 일찍이 조국광복을 위한 불굴의 투지로 항일구국전선에 투신함으로 일정한 주거도 없이 생계가 어려웠고 자녀들의 교육마저 돌보지 못하는 역경을 겪으셨다. 1945년 광복후 남북분단과 좌우대립으로 국내정치가 혼란에 빠지자 동족간의 갈등을 개탄하며 추이를 지켜보시던중 6.25전쟁이 발랍하기 몇일전에 추가하신후로 생사를 알길없이 지내왔으나 여러가지 정황을 참작하건대 불행히도 그 이듬해 8월 타계하셨음이 확실해졌다. 이렇뜻 선생께서는 가사를 돌봄이 없이 일생을 오로지 나라사랑과 헌신으로 일관하셨으며 학덕을 겸비한 고귀한 인품과 불의를 용납치 않으신 강직성은 세인의 존경을 받았었다. 선생의 구국일념의 생애야 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의 좌표요 귀감이 아닐 수 없으며 남기신 유덕의 여훈은 후세에 길이 빛날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숭고한 행적이 높이 평가되어 정부에서 광복50주년을 맞아 그 공훈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ㄷ가. 이에 향내 후학들은 선생의 높으신 뜻과 얼을 되새기고 추모학기위하여 유족과 함께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693-2 애국지사 백아 이정기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건립기
사람이 사는 참된 의의는 헌실하고 봉사하는데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함께 더불어 살 뿐 아니라 참여와 봉사가 국가존립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때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그 이상의 헌신은 없을 것이다. 백아 이정기 선생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되고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20대 젊은 시절부터 전생애를 구국일념으로 고고한 지사의 길을 걸으신 분이시다.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숭고한 행적을 오래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니 천년의 비바람도 이 돌에 새겨진 유덕을 결코 마모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사는 참된 의의는 헌실하고 봉사하는데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함께 더불어 살 뿐 아니라 참여와 봉사가 국가존립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때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그 이상의 헌신은 없을 것이다. 백아 이정기 선생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되고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20대 젊은 시절부터 전생애를 구국일념으로 고고한 지사의 길을 걸으신 분이시다.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숭고한 행적을 오래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니 천년의 비바람도 이 돌에 새겨진 유덕을 결코 마모하지 아니하리라.
애국지사 백아 이정기선생 추모비
인생의 평범한 죽음은 단순한 삶의 종말이지만 의의있는 생애의 고별은 위대한 역사적 교훈을 남겨 후학의 귀감이 된다. 풀잎의 이슬같이 짧은 일생을 오직 의를 쫓아 바르게 사는 일이야말로 지사의 지고의 덕목이다. 그러나 세속적 범인으로서는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할뿐더러 설혹 알고도 실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 실행에는 희생과 고행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어려운 길을 몸소 자원 감내하고 일생을 의의 구현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 계시니 바로 백아벽진 이공 휘 정기 지사이시다. 선생은 1898년 5월 12일 경북 성주 검곡에서 고려 개국공신은 시조 벽진장군 이공언 고려 거유 대제학 건헌 조선 인조대의 명유 언영의 후예로서 조부 덕후 부 우원의 차남으로 전통적인 유가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은 천자가 빼어나 일찍 영남 명유인 외조부 홍와 이두훈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개화기의 신학문에 뜻을 두어서 서울 중동중학교 본과를 졸업하였으며 나아가 중국연경대학(현 북경대학)에서 수학하셨다. 이와 같이 선생께서는 신구학문을 두루 닦았을 뿐만 아니라 근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