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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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804-1
탐방로그
성주군 수륜면 수성2리 (갓말: 수륜-대가) 정류장에는 순국선열 성재 정재기 선생 묘도비, 애국지사 뇌헌 정종호 선생 사적비로 향하는 안내판이 있었다. 정재기 선생 묘와 정종호 선생 사적비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파리장서(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독립탄원서)에 서명하시고 동참하심으로 세계 각국에 대한민국의 국권회복을 엄중히 청원하셨다.
하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1919년 기미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민봉기와 더불어 그 일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서의 출두 통보를 받으시자 선생께선 더 이상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없을 뿐만아니라, 유의유관(선비의 의관)으로는 일제의 법정에 서지 않겠다는 굳은 결으로 1919년 음력 3월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살신보국의 길을 몸소 실천하셨다. 평소 선생께선 선비로서 마땅히 학문을 닦으며 도를 행하되 그 품은 뜻을 이를 수 없다면 마음과 몸이 욕되지 않는 온전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말씀을 누차하셨다. 그간의 내재된 수신과 수행이 없었다면 어찌 감히 살신성인의 의로운 죽음을 택할 수 있으랴! 이에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선생이 명실상부한 독립유공자이심을 공식으로 인정했다. 또한 선생의 유품 약1200점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여 영구 보관하게 됨으로써 선생의 행적과 더불어 당시 유림의 애국적 활동상황을 밣히는데도 더 없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 묘도비는 본래 선생의 대기동 묘소앞에 세워졌으나 2009년 6월 선생의 묘소와 배위 안동권씨의 묘소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합장으로 이장하게 됨에 따라 일찍이 선생께서 태어나시고 평생을 살아오신 이곳 고향 마을에 다시 옮겨 세우게 되었다. 비록 선생의 묘소는 이제 이곳에 없으나 곳곳에 남아있는 선생의 족적과 투철한 선비정신, 숭고한 나라 섬김 정신이 대조 한강선생의 후손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와 우리의 다음세대 또 그 다음 자자손손에게 좋은 본보기로 남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간의 사정을 간략히 적어 여기 남긴다.
성재 선생 서원정공 묘도비
성주군 수륜면 수성2리 (갓말: 수륜-대가) 정류장에 있는
순국선열 성재 정재기 선생 묘도비, 애국지사 뇌헌 정종호 선생 사적비 안내판을 찾아왔다.
성재 정재기 선생 묘도비 이전기
이 비는 1857년 이곳 기촌(갓말)에서 태어나시고 1919년 돌아가신 독립유공자 정재기선생(자 성로, 호 성재)의 묘도비이다. 선생께서 문목공 한강 정구선생의 13대손이며 징사 지애공의 5대손으로 아버지 성함은이시고 어머니는 옥산 장씨이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시고 타고나신 재주 또한 출중하셨으나 자신이 게으로고 우둔하여 성현들의 학문에 미치지 못함을 항시 경계하셨고, 사람은 물론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공명정대하셨으며 행동하심이 방정하셨음으로 수신과 수행을 함에 있어 자연스럽게 언행일치와 지행일치를 이루신 큰 선비이셨다. 무릇 선비가 독서를 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곧 도를 이루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독서 좌우명과 수신계율을 따로 적어 곁에 두시고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닦고 스스로 깨우치시며, 60여 평생을 솔선수범하여 의와 선을 행하시려고 노력하셨다. 선생은 또한 단순히 옛 성현들의 학문과 가르치심을 답습하고 따르는 안이한 생각에서 탈피하여 잘못된 구습을 과감히 혁파하여 선을 행하는데 정성을 다하시고 덕을 인근 사방에 골고루 베푸셨다 하여 주변과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개결한 군자라고 흠복했다고 한다. 이러한 선생의 이략이 있었기에 보모를 위한 효도와 나라를 향한 충의가 안과 밖으로 크게 어긋남없이 물 흐르듯 하나로 귀결될 수 있었던 것이니라. 1910년(경술년 국치의 해) 일제의 국권침탈 소식을 접하신 선생께선 국가를 책임진 사람이나 초야에 묻혀사는 이름없는 백성이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는 졍중이 다를 수 없다고 개탄하시며 십년을 오직 나라를 잃은 울분과 나라를 되찾을 일념으로 세월을 보내시다가 영.호남선비 137명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