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 1098-1
- 탐방로그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 1098-1에 위치한 의사 호당 김희규 선생 기념비를 찾았다. 의사 호당 김희규 선생 기념비는 이봉희 지사 기념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사 호당 김희규 선생 기념비
경부 성주 출신으로 1919년 4월 2일 성주장날을 기하여 이기정, 송인집 등이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기독교계통에서도 이날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확정하고 거사준비를 하고 있던 중 유림계통의 소식을 전해듣고 진보적인 전술로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이날 모인 700~800명의 시위군중은 경찰서 앞으로부터 남방군청 앞 및 양쪽 소로에 까지 모였고 시장통에는 약 1,500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 때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일경이 해산을 강요하면서 발포하여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렵게 됨에 따라, 시위군중은 산위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피체되고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 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경부 성주 출신으로 1919년 4월 2일 성주장날을 기하여 이기정, 송인집 등이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기독교계통에서도 이날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확정하고 거사준비를 하고 있던 중 유림계통의 소식을 전해듣고 진보적인 전술로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이날 모인 700~800명의 시위군중은 경찰서 앞으로부터 남방군청 앞 및 양쪽 소로에 까지 모였고 시장통에는 약 1,500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 때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일경이 해산을 강요하면서 발포하여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렵게 됨에 따라, 시위군중은 산위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피체되고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 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의사 호당 김공 희규 기념비
선생의 자는 우문이요 아호는 회당이며 용모의 아들로 본관은 김해이다. 선생은 1894년 10월 10월 1일 경북 성주군 성주읍 용산동에서 출생하여 일찌기 엄친 슬헤서 전통교육인 한학을 수학하고 성장함에 따라 애국정신이 투철하며 항일구국에 뜻을 두고 그 기회를 얻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려 오던 중 1919년 선생의 나이 약관 26세에 3.1독립만세운동이 경향 각지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될 때 선생은 남달리 강한 애
국애족의 충정으로 본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향우 동지인 송회근 송우선 송수근 이봉희등과 더불어 자주 회합 열의끝에 모든 계획을 수립하여 군내에 거주하는 다수 동지들을 규합하여 태극기와 선전문을 만들어 군내 각면 동리에 배포하고 거사 준비가 완료되자 동년 4월 2일 성주읍 시일을 기해 시장에 운집한 수천 군민과 합류하여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시외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성주경찰서로 달려갔으나 당황한 일경들의 총탄발사로 사상자들을 내게 되자 많은 군중들은 해산되고 선생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지방법원에서 일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혹고를 겪었다. 그리고 선생은 출옥후에도 일경의 감시에 굴하지 않고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고취하며 지하운동을 펴오던중 1945년 8월 15일 몽미간에 그리던 조국 광복의 날을 맞이하였으나 그 격분은 잠시뿐 해방된 조국의 강토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국토분단이라는 또다른 비극을 초래하게 되어 선생은 일구월심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는 나날을 보내다가 애석하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59년 10월 15일 한맺힌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의사 호당 김희규 선생 기념비가 있는 곳의 주소는 경북 성주군 성주읍 용산리 1098-1이다.
이봉희 지사 기념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봉희 지사 기념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