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367-2
- 탐방로그
-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367-2에 위치한 성주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를 찾았다. 성주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는 성밖숲 남쪽 도로변에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청천서당(晴川書堂)에 근대식 교육기관인 사림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개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오늘날 발전된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선조들의 훌륭한 정신은 오늘날 나눔과 책임의 정신과도 연결된다. 그리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심을 고양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서기 2014년 1월 일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건립
서기 2014년 1월 일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건립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367-2 성밖숲 남쪽 도로변 성주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를 찾아왔다.
星州郡 國債報償運動 紀念碑
(성주군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성주군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星州郡 國債報償運動 紀念碑
(성주군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성주군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대구에서 김광제(金光濟) 서상돈(徐相敦) 등에 의하여 발의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운동이다. 이 운동은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하기 위하여 획책한 국채 1300만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운동이 성주지역에 파급된 계기는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에 의해서다. 경상우도의 큰 선비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승희(李承熙)는 1907년 3월 20일 성주군국채보상의무회(星州郡國債報償義務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으며 경남지역국채보상회 회장을 겸하였다. 이때 부회장은 이덕후(李德厚)였으며 함께 발의한 사람은
배우홍(裵遇鴻) 이만희 이희철 이기철 등 23인이었다. 뒤에 설립된 대한협회 성주지회의 임원 및 회원도 다수 이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성주지역의 문중과 마을이 대부분 참여하였다. 많은 군중이 참여한 이날 모임에서 전의관(前議官) 이회영은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군수 김흥기(金興基)는 즉석에서 100원을 출연하였다. 전남 광주 출신 행상인 장도선(張道善)도 의연했으며 부인은 물론 기생과 과부 등도 반지와 비녀를 의연하였다. 장석진 김달곤 이기두 등의 열성적인 의연금 모집활동은 충효를 겸비한 인물로 칭송되었으며 상민 김사일(金士一)의 적극적인 의연활동과 현지에 거주하던 일본인 풍산언병위(豊山彦兵衛)와 기생 매선(梅仙)의 의연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날 의연(義捐)된 금액은 1079원 69전이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2일 잡보에 게재된 성주군국채보상취지서에서는 국채의 상환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다고 하며 국민의 의무로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승희는 거듭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1908년 5월 블라디톡으로 망명을 하고 성주군국채보상의무회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조직적인 방해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1910년 4월 국채보상금처리회 전국대표 회의에 김창숙이 성주군 대표로 참석하였으나 원만하게 처리되지 못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성주지회에서 보관하고 있던 국채보상금으로 김원희(金元熙) 도갑모(都甲模) 이항주(李恒柱) 이진석(李晉錫) 배동옥(裵東玉)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