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802-3
- 탐방로그
-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802-3에 위치한 이봉희 선생 기념비를 찾았다. 이봉희 선생 기념비는 국도변에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 선비로서 몸을 비 바람속에 던저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치고 업적을 남겨 후세이 드리운 이가 계시니 이분이 이봉희지사이다. 지사의 자는 성옥 호는 인와이며 본관은 성산이다. 1878년 4월 7일 이 땅 이 고장에서 나시니 이주상님의 여섯째 아드님이다. 1910년 조국의 ○○이 무너지자 통곡하며 사당에 고별하고 단식 자결로 항쟁을 꾀하였으나 가족들에
알려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결심한바 있어 자결항쟁은 값없는 죽엄이라 생각한 나머지 고향산천에 눈물을 뿌리시며 일어나 동지를 찾고 뒷날의 큰 일을 위하여 각처를 두루 다녔다. 1919년 전국 곳곳에서 3.1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매 송준필 김창숙 이기정 성대식 곽종석님외 여러 동지와 손을 잡고 지금 불란서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니 이 기회에 유림단을 통하여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아울러 시위운동을 펴기로 뜻을 모아 마침내 성주 장날 수만 군중이 모인 앞장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서를 무찌르려 하였으나 경찰의 총탄발사로 형 태희님은 그 자리서 숨지고 지사는 총상을 입은채 여러동지와 왜적에 넘겨지니 그해 4월 2일이다.
대구에서 3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또 다시 구국운동을 꾀하므로 예비검속을 겪다가 광복을 맞이 하였으니 조국통일 못본채 1960년 9월 4일 세상을 떠나시니 78세이다
높으신 그 이름 이봉희지사 여기에 지사의 이름을 새기고 부르나니 온 국민과 함
대구에서 3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또 다시 구국운동을 꾀하므로 예비검속을 겪다가 광복을 맞이 하였으니 조국통일 못본채 1960년 9월 4일 세상을 떠나시니 78세이다
높으신 그 이름 이봉희지사 여기에 지사의 이름을 새기고 부르나니 온 국민과 함
께 부르고 받들것이요 억만후세까지 길이 외치고 모시리라. 지사이시여 그리고 지사와 함께가신 수많은 선열이시여 길이 이곳에 계시여 이 산과 들을 지켜주시옵소서.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879-4 마을 앞 국도변 인와 이봉희 지사 기념비를 찾아왔다.
이봉희지사 기념비
경북 성주출신으로 본관은 성산 성은 이 호는 인와 이름은 봉희이시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신 이와 이봉희지사의ㅣ(1878.4.9 ~ 18609.29. 1990년 12.21 건국훈장 애족장) 애국정신을 추모비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인와 이봉희지사는 1910년 조국의 주권이 무너지자 통곡하시며 전국 각지를 두루다니시며 유림동지를 찾아 규합하여 1919년 전국 곳곳에 3.1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 송준필, 김창숙, 이기정, 성대식, 곽종석, 장석영님 등 137인의 여러동지와 손을 잡아 지금의 프랑스 파리에서 만국평화회담이 열리자 전국 유림단이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아울러 독립운동을 펴기로 뜻을 모아 성주장날(1919.4.2) 수만군중을 모아 앞에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며 성주에 있는 일본 경찰서를 무찌르려 하셔쓰나 일본 관현경찰 총탄에 형인 태희씨는 그 자리에서 숨지시고 지사는 총상을 입은채 왜경에 체포되어 1919년 8월 21 대구복심법원에서 10월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셨다.
경북 성주출신으로 본관은 성산 성은 이 호는 인와 이름은 봉희이시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신 이와 이봉희지사의ㅣ(1878.4.9 ~ 18609.29. 1990년 12.21 건국훈장 애족장) 애국정신을 추모비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인와 이봉희지사는 1910년 조국의 주권이 무너지자 통곡하시며 전국 각지를 두루다니시며 유림동지를 찾아 규합하여 1919년 전국 곳곳에 3.1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 송준필, 김창숙, 이기정, 성대식, 곽종석, 장석영님 등 137인의 여러동지와 손을 잡아 지금의 프랑스 파리에서 만국평화회담이 열리자 전국 유림단이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아울러 독립운동을 펴기로 뜻을 모아 성주장날(1919.4.2) 수만군중을 모아 앞에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며 성주에 있는 일본 경찰서를 무찌르려 하셔쓰나 일본 관현경찰 총탄에 형인 태희씨는 그 자리에서 숨지시고 지사는 총상을 입은채 왜경에 체포되어 1919년 8월 21 대구복심법원에서 10월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셨다.
인와 이봉희 지사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