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791-5
- 탐방로그
-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791-5에 위치한 이태희 선생 기념비를 찾았다. 해당 장소는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879-4 마을 앞 국도변 인와 이봉희 지사 기념비의 부근이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대한의사 성산이공 태희 지비
경북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791-5 이태희 지사 기념비를 찾아왔다.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879-4 마을 앞 국도변 인와 이봉희 지사 기념비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879-4 마을 앞 국도변 인와 이봉희 지사 기념비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태희(李兌熙) 1869.5.23 ~ 1919.4.2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가암이며 자는 치운 보관 성산인이다. 1910년 민족의 수치인 한일합방이 강제되니 격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구국운동을 결심하여 의사가 상통하는 원근 동지들과 시사를 담론하였다. 1919년 3월경 명유 송공신의 독립운동 통고문을 접하고 고산동 소재 백세각에서 유생들과 상의하여 동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이기정, 성대식, 이봉희, 송수근, 송우선, 송훈익, 김회규, 송준필, 송회근, 송문근, 송인집, 송규선, 송천흠을 중심으로 한 유림과 유진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이 연합하여 전개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성주장터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가암이며 자는 치운 보관 성산인이다. 1910년 민족의 수치인 한일합방이 강제되니 격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구국운동을 결심하여 의사가 상통하는 원근 동지들과 시사를 담론하였다. 1919년 3월경 명유 송공신의 독립운동 통고문을 접하고 고산동 소재 백세각에서 유생들과 상의하여 동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이기정, 성대식, 이봉희, 송수근, 송우선, 송훈익, 김회규, 송준필, 송회근, 송문근, 송인집, 송규선, 송천흠을 중심으로 한 유림과 유진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이 연합하여 전개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성주장터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는데 시위군중이 성주경찰서를 습격한다는 소문에 긴장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일본경찰이 시위군중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맞섰다. 그러나 겁을 먹은 일본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벌이던 그는 결국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장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