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해용 추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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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518-10
탐방로그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518-10에 위치한 안해용 선생 추념비를 찾았다. 경북 성주군 대가면 흥산리로 가는 중에 만날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순흥안공 휘 해용 추념비
선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의(義)를 밝힐지언정 그 리(利)를 도모하지 말며 그 도(道)를 밝힐지언정 그 공(功)을 계고하지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국운이 쇠퇴하여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 당하고 한일합병으로 온 나라는 일제의 발아래에 짓밟히고 온 밳겅들은 질곡애 묵인 채 나아갈 길을 잃고 허더기던 그 판탕했던 어둠의 세월에 조국광복의 대의앞에 사생취의의 길을 태하여 광복단 모집에 헌신하셨던 한 애국지사 어른의 꽃다운 행적이 있으니 그 대강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해용이요 자는 무오이며 본관은 순흥이니 삼한의 거족이다. 조 휘 처연은 은사로 효성이 지극하셨고 고 휘 시규 자 응서는 단사로 효우근천하시었고 비는 진양정씨 휘 기일의 녀로 현숙하시었다. 공은 고종 갑술2월 7일에 3남 3녀중 차남으로 경북 성주군 벽진면에서 태어나시었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랐고 공검근면하여 향리 원로들의 아낌없는 기대와 촉망을 받았느나 장년에 이르자 망국의 한을 품은 나머지 가솔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간도로 이주하여 절치부심하는 참담한 생활을 꾸려 가던 중 광복단 참리부장인 조병준을 만나 조선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각오 끝에 의기투합하여 그의 인도로 동단 사령관 조먕선을 만나 장차 조선으로 돌아가 국권회복을 위해 광복단원
모집활동에 적극 헌신알 것을 맹세하고 그 즉시 광복단 경북특파원이라는 신임장을 안고 아울러 모집한 광복단원을 만주 땅으로 잠입시킬 ㄸ깨에는 의주에 사는 김옥명동지와 긴밀한 협의 끝에 압록강을 건너도록 하라는 지침을 받고 대정9년 12월 25일경에 국내로 들어왔다. 고국으로 돌아온 공은 그 이듬해 음4월에 대구 서상일을 찾아 광복단의 취지와 목적을 상세히 동단에 보낼 장정을 모집하는데 힘써 줄 것을 간곡히 말하고 동년 음8월에는 칠곡군 기천면 신동 예수교회당에서 이덕생 이수건등에게 단원가입을 권유하여 찬동을 얻은 결과 이 두 장정이 의사 김옥명의 안내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간도광복단에 가담할 수 있도록 적극노력하였다. 또 안동읍내 예수교회당에서도 광복단활동을 펼쳤으며 이듬해 대정11년 음10월 6일에는 상주읍내 예수교회당에서 김동필에게도 같은 취지와 목적을 말하고 모집을 극력 권유하는 등 각방으로 주소일념 애국활동에 온 힘을 하였으나 기대하던 성과를 크게 거두지는 못하고 같은 해 섣달 본적지인 성주군에서 체포되어 압송되는 도중에도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시며 백척불굴의 의로를 밝혓으나 무도한 일제는 귀를 막은 채 치안유를 방해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징역2년이라는 고초만을 안겨주었다.
아! 문신은 돈을 아끼지 않고 무장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가히 태평을 누릴 수 있다는 충신 악비의 말이 정녕코 것짓된 말일 수 없다. 나라를 잃은 백성이 고향을 등지고 이역만리 객지에로 떠돌아 다님ㄷ고 익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거니와 조국광복을 위해 힘쓰시다 영어의 몸이 되셨던 공의 행적도 오리혀 당연한 일이였다. 그러나 오늘 새삼스럽게 공의 충의를 추년하는 까닭은 간혹 입에 맞는 웅장만을 취할 줄 알지 의로운 길을 저버리거나 잊어버리는 자들에게는 크나 큰 경계가 되겠기에 이에 공에 대한 공적기록을 참작하여 그 대강을 적어 새삼 추념하노라.
성주군 벽진면 가암리 5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