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15
- 탐방로그
-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15에 위치한 김원술 기념비를 찾았다. 김원술 선생의 이명은 김창렬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우는 바이다.
서기 1974년 3월 1일
서기 1974년 3월 1일
마을입구
GPS 상의 주소는 개가면 칠봉리 515이다.
GPS 상의 주소는 개가면 칠봉리 515이다.
3.1독립유공 직산 김창렬 선생 기념비
일찌기 겨레가 일제의 탄압아래 신음하고 있을때 겨레를 지키고 인도한 의인 지사들도 많았거니와 자고로 이름난 절의의 고장 성주의 땅에도 호국항일의 얼은 줄기차게 물결치고 있었으니 그 한분이 직산 김창렬선생이시다. 선생은 서기 1897년 정유 5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 535번지에서 휘 철림공의 차남으로 출생하셨다. 거슬러 올라가면 선생은 동강 김우현선생의 13세손이 되신다. 아명은 원술이요 자는 성주 호는 직산이요 본관은 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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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10년 치욕적인 결술합방조약이 제쳘되었을 때 불과 14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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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10년 치욕적인 결술합방조약이 제쳘되었을 때 불과 14세의
나이로 향리에서 오적을 성토하셨고 또한 족형 심산 김창숙선생님을 도와서 유림국사건등에도 적지않은 관련을 맺으셨다. 1919년 마침내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역관 23세의 몸으로 배상윤 서병준 백성흠 노기학 박경하 김구진등 향리의 동지들을 규합 성주시장의 만세사건을 주도하셨다. 선생은 수 많은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장짐처럼 가장하여 거사일인 4월 2일 성주시장에 운반 이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셨다. 수만 시장군중들은 노도같이 만세를 불그니 천지가 진동하는듯 했다. 이때 약3,4천명의 군중들이 행진을 일으켜 일경과 충돌 마침내 경찰서를 포위하여 투석전을 버렸으나 잔학한 일경들의 총칼로 많은 인명피해를 남긴채 거사는 ○절되고 말았다. 선두에서 지휘하던 선생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니 상기 6명의 동지들과 함께 7개월의 옥고를 대구형무소에서 치루게 되셨다. 선생은 혹ㄱ심한 구문에도 또한 감언의 회유책에도 굴하지않고 법정진술에서 용감히 독립의 신념과 항일의 소신을 피력 온 장내를 숙연케 하셨다. 출옥때는 성주읍에서 본댁각지 10리길을 가족에서 보내온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귀가하시던차 출영나온 연도민들에게도 무언으로 깊은 독립정신을 일개워주셨으니 분성김씨 종중에서는 일금 삼십원을 거출 약비로 보내에 선생을 가상한바 있다. 후에도 줄곧 선생은 강인한 항일의 지조로서 겨레의 독립을 희구 마침내 해방을 맞이 했으나 일경들의 모진 고문으로 잃어버린 건강을 끝내 회복하지 못한채 1949년 기축 11월 24일 향년 53세로서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는 선생의 높고 거룩한 호국의 얼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저 절의의 땅 성주에 이 기념비를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