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 340-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광복후 54년이 지난 1999년 광복절에 국가에서 건구훈장을 추서하여 보훈하였고 이제 또 이곳 3.1만세동산에 관비로 추모비를 세워 공훈을 천양하고 의거를 기념하니 그 숭고한 애국정신은 영원히 세인의 귀감이 되리라.
애국지사 후곡 채섬환 선생 추모비
후곡 채섬환선생은 한말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때 창의하여 40여 의병장과 함께 운강 이강년 도체찰사를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막하에서 좌종사로 활약한 애국지사이다. 선생은 고종11년(1874) 10월 3일 인천채씨 우헌공 후손의 세거지인 이안면 여물리에서 녀능공 세필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이럴때 부터 충젉의 가풍에 유염되어 지취가 고상하였으며 약관때 갑오경장이 시작되고 단발령이 강행되며 황후가 시핵되고 뒤이어 을사조약이 늑결되며 의병이 봉기하자 결연히 창의하여 인근주군으로 동지를 찾아 다니면 의병과 군수물자를 모으고 왜적에게 부하아는 매국노들을 규탄하였다. 강희1년 운강대장이 칙령을 받고 대오를 정비 거병하자 선생은 용궁의 참모관 흑랑 한태섭고가 대장의 장자 종사 이승재와 제휴 대장의 격문을 해역배포 하여 의분을 충동하고 사기를 드높이며 좌종사중에서 선임된 신태식 소모 후군장과 문경의 신상희 운량
도감및 신명교 화약도감의 전략에 따라 병원을 증강하고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당시 영춘에서 기병하여 청풍에서 대장이 순국할때까지 1년간 30여회의 격전을 태백과 소백의 산악지대에서 장마와 폭설을 무릅쓰고 밤에는 기습공격하고 낮에는 매복유격하기 위해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량과 화약 심지어 의복과 신발까지도 어김없이 공급하는 임무를 완수한 좌종사들의 공적은 결코 적지않았으며 전과에 미친 영향 또한 매우컸다. 대장이 순국한후 그가 임종때 팔역의 동지에게 고결한 유서를 전해 받아 이를 해역하여 널리 배포. 복수를 다짐하는 한편 운강의 장자 승재와 묵랑의 자 양이와 함께 중군장 김상태를 대장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소백산에서 활약하다가 양이가 왜적에게 잡혀 부득이 모두 흩어졌다. 경술년(1910년) 동래에서 국치의 비보를 받고 통분하여 침식을 잊고 고심하다가 심화병을 얻어 종신토록 고치지 못하였으며 이로부터 집옆에 세운 양파정에 새벽마다 올라 북향사배하고 통곡하며 광복을 다짐하기를 고종이 승하할때까지 10여년간 계속하였다. 도이의 강점기에는 항절을 더욱 굳건히 하여 왜경의 위협과 감시에 굴하지 아니하고 의관과 보발및 예절을 옛 그대로 지키고 동지들과 함께 서당을 운영하여 후진에게 애국정신을 고취하였다. 선생은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을 1년 앞두고 통한을 품은 채 임정 26년(1944) 9월 3일에 고종하여 상주시 외서면 가곡리 성전산 곤좌에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