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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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상주시 무양동 1-20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갑오년(1894)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근대사에 민족 운동의 효시였다. 반봉건 반외세의 깃발 아래 이 땅의 자주와 민권을 수호하려는 의분의 봉화가 전국에 솟아오를 때 상주 동학농민도 혁명의 횃불 높이 들어 봉수에 불을 당기었다. 상주 동학농민혁명은, 항상 낮은 곳에 있으면서도 국가와 민족이 위난에 처하였을 때 목숨을 바쳐 호국의 수호신으로 승화한 거룩한 삶이 이 땅 이 민족 생존의 맥이었음을 증언하여 왔다. 비록 이 혁명이 겉으로는 봉건 지배 세력의 탄압과 일제의 무력개입으로 좌절되었지만 그것은 도리어 어둠을 내쫓는 불꽃으로, 침묵을 일깨우는 함성으로, 굴종을 거부하는 자존으로 되살아나 민주와 민본, 인간 존엄과 인간 중심을 이념으로 하는 동학정신의 씨가 되어 한국사에 길이 푸를 진실의 나무를 심어 놓았다. 동학혁명 백주년을 맞아 동학농민의 의기로운 외침과 행위를 본받아 이어가고자 남천 소호공원에 훼상되매 상주시가 빗돌과 자리를 마련하였고 기념사업회에서 천봉산 일북천에다 기념상 건립시의 정신을 새로이 담아 이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상주 동학농민혁명의 민족사적 의의를 일깨우는 이 기념비야말로 가장 순박한 이들의 참 목소리와 분노가 얼마나 무섭고 위대한가를 실증하는 역사교육적 표상이요, 나아가 상주인의 자존심으로서 상주의 미래를 열어갈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늘 이 자리 지켜갈 것이다.
단기 4341년(서기 2008년) 10월 일
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글씨 윤대영
상주 동학농민혁명 약사

조선정부의 재정적자와 사회부정부패 그리고 일본의 경제침탈은 이 땅의 농민들을 도탄에 빠트렸다. 그래서 이 지역 동학농민군은 4227(1894)년 봄부터 각 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862 : 상주농민항쟁
1891 : 상주, 함창농민항쟁
4227(1894) 9.18 :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 이후 북접의 상주농민군 봉기 준비
9.22 : 농민군 수천명이 상주성을 점령함.
9.28 : 일본군이 상주성을 공격, 농민군 100여명이 학살당하고 패퇴함
9.29 : 왕조정부가 영남소모사를 임명함
10.19 : 민보군을 흡수하여 소모영 설치
10.22~12.2 : 김석중의 유격병대가 상주, 모동, 화동, 화북, 청산, 용산 등에서 농민군을 색출. 체포하여 처형함. 상주농민군은 태평루(21명) 모동장터(6명 이상) 화동(3명) 화령장터(3명) 화남광주원(2명) 평온(3명 이상) 청산월남정(2명) 청산소사동(2명) 등지에서 처형됨
12.11 : 용산에서 북접농민군이 상주유격병대와 접전하여 승리함
12.12 : 남사정에서 농민군 4명 처형됨
12.14 : 태평루에서 농민군 4명 처형됨
12.18 : 일본군과 상주유격병대가 보은종곡리 북실에서 농민군 2,600명을 살육하여 농민군 완전괴멸됨
12.22 : 남사정에서 농민군 10여명 처형됨
12.23 : 태평루 앞에서 농민군 3명 처형됨
4228(1895) 1.24 : 영남소모영 해체
상주시 무양동 1-204 북천교교차로 주차장 옆 북천공원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비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