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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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산94-4
탐방로그
한서 남궁억 선생의 묘소는 한서초등학교 뒤편에 있었다. 묘소에는 한서 남궁억 선생 묘역 정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서 선생의 묘소 아래쪽에는 남궁억 선생의 장남이자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 제 1대 뉴욕 총영사를 지내신 외교관 남궁염 선생의 묘가 있다. 남궁염 선생 역시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력 1939년 8월 일
자 염, 녀 숙경 자경
한서 남궁억 선생의 묘소는 한서초등학교 뒤편에 있었다.
한서 남궁억 묘역 翰西 南宮憶 墓域
이 곳은 근대사의 선각자이며 독립운동가이신 '한서 남궁억' 선생이 겨레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신 모곡리 〈보리울〉 유리봉이다.
철종(哲宗) 14년 〈1863년 12월 27일〉 남궁 영(南宮泳)의 아들로 태어나 고종(高宗)의 영어통역관으로 관직을 시작한 선생은 칠곡부사(漆谷府使), 내부토목국장(內部土木局長), 독립협회 총무 및 사법위원, 독립협회보 편집장, 황성신문 사장, 양양군수, 대한협회 회장, 관동학회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여섯 차례의 옥고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가운데 겨레의 독립이 민중의 자각과 실천에 있음을 주장하신 선생은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1918년 12월 이곳 보리울(半谷)에 내려와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1939년 4월 5일 생을 마감하기까지 22년동안 무궁화 보급운동과 함께 1백여곡의 애국 사상가를 지으셨고, 조선이야기와 동사략(東史)등의 저술을 통하여 나라 잃은 겨레의 가슴에 희망을 심어주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전념하였다.
그러나 1933년 십자당(十字黨) 사건으로 생애 일곱 번째 옥고를 겪은 선생은 "내가 죽거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 나는 독립을 보지 못하나 너희는 반드시 볼 것이니 독립후의 일을 위하여 준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77세를 일기를 생애를 마치었다.
이에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홍천군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묘역을 조성하였다.
한서 남궁억 선생 묘역 정화 기념비
「나는 독립은 못 보아도 너희들은 반드시 볼 것이다. 내 몸은 과일나무 아래 묻어 거름이라도 되게 하라」 하는 유언을 남기시고 거룩한 일생을 바치신 한서 남궁억 선생님이 여기 묻히셨다. 1863년 12월 27일 서울 교동에서 태어나시어 1939년 4월 5일 77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생애를 마치시기까지의 선생의 발걸음은 자국마다 겨레사랑의 꽃이 피었고 분분초초 나라사랑의 횃불이였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구한말에 선생은 개화의 선각자이며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의 선봉에 서서 싸우셨으니 때로는 관직을 통하여 민중교화에 신명을 바치셨으며 때로는 독립협회 총무 황성신문 사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국정개혁과 사회계몽을 위해 온갖 심혈을 다 기우리셨다. 한일합방 후에도 선생은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시다가 1918년 선향인 이곳 보리울에 낙향하시어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한국역사를 서술하며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보급하는 등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하여 끝까지 진력하시었으니 선생이 이 땅위에 남기신 위업은 참으로 크고 넓으셨다. 이렇듯 민족혼의 등대로서 영원히 빛나는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나라에 충성하고 겨레에 봉사하려는 우리 홍성군민은 선생을 추모하고 기리는 여타사업과 함께 박종성 강원도지사님의 특별하신 도움과 뜻있는 인사의 정성에 힘입어 이곳을 정화하여 기리 애국 애족의 도장으로 삼고자 한다. 이제 이 강산이 세계의 과원이 될 날이 멀지 않았고 선생은 영원토록 그 거름이 되어 주실 것이다.
서기 1977년 12월 30일 홍천군수 성기방
한서 선생의 묘소 아래쪽에 있는 남궁억 선생 장남 전 뉴욕총영사 남궁염의 묘
정삼품 통정대부 칠곡부사 남궁억의 묘, 배 숙부인 남원양씨 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