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산6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
'청량지문'에서 소개되었던 유리보전(琉璃寶殿).. 저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되어있었다.
청량사 유리보전
청량산에 위치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 의상대사가 지은 절이다.
청량산에는 연대사라는 절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했던 곳이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법당으로 약사전이라고 하다. 늘 바람이 세찬 산골짜기의 한쪽에 나즈막하게 지었는데, 법당앞이 절벽이라 마당이 좁은 편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대들보 밑에 사이기둥을 세워 후불벽을 설치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청량산에 위치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 의상대사가 지은 절이다.
청량산에는 연대사라는 절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했던 곳이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법당으로 약사전이라고 하다. 늘 바람이 세찬 산골짜기의 한쪽에 나즈막하게 지었는데, 법당앞이 절벽이라 마당이 좁은 편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대들보 밑에 사이기둥을 세워 후불벽을 설치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봉화 청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이 삼존상은 현존하는 16세기 불상 중에서 종교성과 조각적 완성도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이 불상을 봉안한 사찰이나 각자, 다양한 시주층 등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양식을 분석한 결고, 이 삼존상은 157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임진왜란(1592~1598)을 기점으로 나뉘는 조선 전기와 후기의 불교 조각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불상에서 보이는 개성이 있는 표현이라든지 우수한 조형성 등을 통해서 볼 때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조성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삼존상은 현존하는 16세기 불상 중에서 종교성과 조각적 완성도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이 불상을 봉안한 사찰이나 각자, 다양한 시주층 등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양식을 분석한 결고, 이 삼존상은 157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임진왜란(1592~1598)을 기점으로 나뉘는 조선 전기와 후기의 불교 조각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불상에서 보이는 개성이 있는 표현이라든지 우수한 조형성 등을 통해서 볼 때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조성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봉화 청량사 건칠보살 좌상및 복장 유물
봉화 청량사 건칠 보살좌상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있는 청량사 소장의 고려시대 불상 가운데 하나이며, 복장 유물과 더불어 2015년 12월 28일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491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보살상의 일종으로서 옻을 입힌 삼베를 여러 겹 붙여 만든 건칠상이다. 눈 부위에 감입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손 부위는 옷칠을 한 헝겊인 칠포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관과 등 부분에 손상이 있으며, 보수를 한 흔적이 발견된다. 도금 상태는 양호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외형은 잘 유지되어 있다. 불상의 정확한 제작 연도와 제작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얼굴, 신체 옷을 입은 모습 등으로 보아 12~13세기에 영남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국내에서는 드문 건칠, 칲포상이라는 점에서 고려 시대 불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봉화 청량사 건칠 보살좌상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있는 청량사 소장의 고려시대 불상 가운데 하나이며, 복장 유물과 더불어 2015년 12월 28일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491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보살상의 일종으로서 옻을 입힌 삼베를 여러 겹 붙여 만든 건칠상이다. 눈 부위에 감입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손 부위는 옷칠을 한 헝겊인 칠포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관과 등 부분에 손상이 있으며, 보수를 한 흔적이 발견된다. 도금 상태는 양호하지 않지만, 전체적인 외형은 잘 유지되어 있다. 불상의 정확한 제작 연도와 제작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얼굴, 신체 옷을 입은 모습 등으로 보아 12~13세기에 영남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국내에서는 드문 건칠, 칲포상이라는 점에서 고려 시대 불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성 및 복장유물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이다. 불상의 초창기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르면 8세기 후반에서 늦어도 10세기 전반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바탕층 삼베의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측정 결과 삼베의 제작연도는 770년~945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는 93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999호 합천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건칠불상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갖는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불상은 오래전부터 청량사 유리보전의 주불로 봉안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엄숙한 상호, 당당하고 육감적인 양감, 균형 잡힌 신체, 탄력과 절제된 선묘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통의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 양식이 나타난다. 복장유물로는 중수과정에서 납입된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과 후령통, 복장전적및 금강계만다라 등 모두 19건 208점이 있다. 이 중 1560년 중수 때 납입된 '천인동발원문'에는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후,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중수된 기록이 담겨있다. 또한 '삼십칠존종자만다라팔엽일륜'은 고려 고종 26년(1239)에 납인된 것으로서 불상의 중수 연대 추정에 도움을 주고 있다.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이다. 불상의 초창기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르면 8세기 후반에서 늦어도 10세기 전반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바탕층 삼베의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측정 결과 삼베의 제작연도는 770년~945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는 93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999호 합천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건칠불상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갖는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불상은 오래전부터 청량사 유리보전의 주불로 봉안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엄숙한 상호, 당당하고 육감적인 양감, 균형 잡힌 신체, 탄력과 절제된 선묘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통의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 양식이 나타난다. 복장유물로는 중수과정에서 납입된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과 후령통, 복장전적및 금강계만다라 등 모두 19건 208점이 있다. 이 중 1560년 중수 때 납입된 '천인동발원문'에는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후,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중수된 기록이 담겨있다. 또한 '삼십칠존종자만다라팔엽일륜'은 고려 고종 26년(1239)에 납인된 것으로서 불상의 중수 연대 추정에 도움을 주고 있다.
地藏殿(지장전)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길과 달리 청량사 일주문이 있었던 선학정으로
청량사(淸凉寺)
청량산에는 원효대사가 우물을 파 즐겨 마셨다는 원효정과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봉, 의상대라는 명칭이 남아있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청량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33개의 임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때 원효대사,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8)에 의해 중창된 고찰이다. 본전은 유리보전이며, 금탑봉 아래 응진전은 68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된 유리보전은 동방유리광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으로,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장보살, 우측에 문수보살이 있다.
역사여래 부처님은 특이하게도 종이재질을 이용한 지불(紙佛)로서, 이곳에서 지극정성으로 기원하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 성취의 영험이 있는 약사도량이다.
청량산에는 원효대사가 우물을 파 즐겨 마셨다는 원효정과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봉, 의상대라는 명칭이 남아있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청량사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33개의 임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때 원효대사,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8)에 의해 중창된 고찰이다. 본전은 유리보전이며, 금탑봉 아래 응진전은 68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된 유리보전은 동방유리광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으로,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장보살, 우측에 문수보살이 있다.
역사여래 부처님은 특이하게도 종이재질을 이용한 지불(紙佛)로서, 이곳에서 지극정성으로 기원하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 성취의 영험이 있는 약사도량이다.
바위위에 자리를 잡은 나무
庚戌 十月 十八日(경술 십월 십팔일).
安東鎮 討捕使(안동진 토포사)
德水 李民秀 到此(덕수 이민수 도차)
軍官 宋學東(군관 송학동)
營吏 金聖儉(영리 김성검)
知印 李濟範(지인 이제범)
從之(종지)
安東鎮 討捕使(안동진 토포사)
德水 李民秀 到此(덕수 이민수 도차)
軍官 宋學東(군관 송학동)
營吏 金聖儉(영리 김성검)
知印 李濟範(지인 이제범)
從之(종지)
청량사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은 가깝지만 매우 가파른 길이었다.
청량사주차장에서 촬영하였던 청량사 일주문. 청량사에서 내려오는 길은 30분이 걸렸다.
청량사 주차장에서 걸어서 주차를 한 입석주차장으로 원점회귀했다.
이 안내판에는 1.8km로 되어있지만, 잘못되어있다. 0.8km이다.
이 안내판에는 1.8km로 되어있지만, 잘못되어있다. 0.8km이다.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산 64 청량산 청량사 청량정사 부근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을 넣어 불태워 죽인 느티나무 고목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淸凉之門(청량지문)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을 넣어 불태워 죽인 느티나무 고목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淸凉之門(청량지문)
청량산 도립공원 안내도
청량산 산행 코스에 6곳이 있다고 되어있다. 1시간 코스부터 9시간 코스까지
청량사에 가는 길이 3곳이 있다. 각각 청량폭포 주차장, 청량사 주차장 선학정, 입석 주차장
청량산 산행 코스에 6곳이 있다고 되어있다. 1시간 코스부터 9시간 코스까지
청량사에 가는 길이 3곳이 있다. 각각 청량폭포 주차장, 청량사 주차장 선학정, 입석 주차장
입석주차장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제일 완만하다고 한다.
청량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하늘다리를 갈 수 있다고 되어있다.
청량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하늘다리를 갈 수 있다고 되어있다.
'청량지문' 앞에 있는 바위. 설명판이 없다.
청량산 유래
청량산은 원래 수산(水山)으로 불렀다. 왜 수산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리적 요인에서 그 연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수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아마도 낙동강이 산 앞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일것이다. 아니면 퇴적암으로 형성된 이 산에 물이 별로 없어ㅅ 그 반대급부로 수산으로 명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때 퇴계 이황도 도산서원의 위치를 정할때 고심한 적이 있는데 청량산에 물이 없다는 이유로 서원을 현재의 도산서원 자리로 정했다고 한다.
청량산이 수산이었다는 사실을 뒷밭침하는 최초의 문헌자료는 '동문선' 이다. 동문선에는 고려시대에 국사로 활동했던 천인의 시가 실려있다. 천인은 치원암 주지가 자신의 시를 보여주면서 청량산 고사를 기록해 주기를 요청하자 이에 회답한 시(致遠庵主以詩見示 仍以請予紀山中故書 次韻答之)에서 청량산을 수산으로 명명했다. 청량산의 옛이름이 수산이었다는 사실은 최근 발견된 관련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1998년 안도대 안동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수산청량사'로 추정되는 명문기와(산청량山淸凉이라는 명문이 새겨짐)가 수습되었다. 따라서 천인이 고려시대 승려라는 사실과 수습된 기와의 편년이 고려시대를 상한으로 조선전기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점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조선전기까지 청량산은 '수산'으로 불려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수산에서 청량산이란 이름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이것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도출해 내기는 어렵다. 다만 청량산과 관련된 문헌과 출토 유물들을 중심으로 대략적인 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다행히 구한말에 출간된 청량산 관련 지리지에서 '수산'이라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어 연대비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01년에 출간된 역사 지리지 '오가산지'에는 '청량산은 재한현 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이 수산이었다. [淸凉山 安東邑誌 在才山縣南 古名水山]'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주세붕을 필두로 조선중기부터 출간된 수많은 유산록을 살펴보면 수산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고 모두 '청량산'으로 통칭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있다. 따라서 천인의 시와 앞서 언급한 기와편의 번와연대를 문헌자료와 더불어 종합해 보면 청량산으로의 명칭변경은 고려 말에서 조선전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천인의 시와 앞서 기와편의 번와연대를 문헌자료와 더불어 종합해 보면 청량산으로의 명칭 변겨은 고려말에서 조선존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량산은 원래 수산(水山)으로 불렀다. 왜 수산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리적 요인에서 그 연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수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아마도 낙동강이 산 앞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일것이다. 아니면 퇴적암으로 형성된 이 산에 물이 별로 없어ㅅ 그 반대급부로 수산으로 명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때 퇴계 이황도 도산서원의 위치를 정할때 고심한 적이 있는데 청량산에 물이 없다는 이유로 서원을 현재의 도산서원 자리로 정했다고 한다.
청량산이 수산이었다는 사실을 뒷밭침하는 최초의 문헌자료는 '동문선' 이다. 동문선에는 고려시대에 국사로 활동했던 천인의 시가 실려있다. 천인은 치원암 주지가 자신의 시를 보여주면서 청량산 고사를 기록해 주기를 요청하자 이에 회답한 시(致遠庵主以詩見示 仍以請予紀山中故書 次韻答之)에서 청량산을 수산으로 명명했다. 청량산의 옛이름이 수산이었다는 사실은 최근 발견된 관련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실제로 1998년 안도대 안동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수산청량사'로 추정되는 명문기와(산청량山淸凉이라는 명문이 새겨짐)가 수습되었다. 따라서 천인이 고려시대 승려라는 사실과 수습된 기와의 편년이 고려시대를 상한으로 조선전기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점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조선전기까지 청량산은 '수산'으로 불려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수산에서 청량산이란 이름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이것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도출해 내기는 어렵다. 다만 청량산과 관련된 문헌과 출토 유물들을 중심으로 대략적인 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다행히 구한말에 출간된 청량산 관련 지리지에서 '수산'이라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어 연대비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01년에 출간된 역사 지리지 '오가산지'에는 '청량산은 재한현 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이 수산이었다. [淸凉山 安東邑誌 在才山縣南 古名水山]'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주세붕을 필두로 조선중기부터 출간된 수많은 유산록을 살펴보면 수산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고 모두 '청량산'으로 통칭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있다. 따라서 천인의 시와 앞서 언급한 기와편의 번와연대를 문헌자료와 더불어 종합해 보면 청량산으로의 명칭변경은 고려 말에서 조선전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천인의 시와 앞서 기와편의 번와연대를 문헌자료와 더불어 종합해 보면 청량산으로의 명칭 변겨은 고려말에서 조선존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량사 유리보전(淸凉寺 瑜璃寶澱殿)
오늘날에는 청량사의 유리보전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연대사(蓮臺寺)의 부속건물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사는 경내의 부속건물을 비롯한 대소 3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큰 사찰이었다.
창건연대는 신라 문무와 3년(663) 원효대사 또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구전될 뿐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건물이 오래되고 무너져 1755년 산 입구로 이건되었고, 이 때 그 터에 불전 하나가 홀로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남아있었다는 불전 하나가 유립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사는 이건된 후 다시 폐사되어 터만 남게 되었고 청량산의 사찰은 유리보전을 중심전각으로 하는 청량사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현재 유리보전은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증.개축하였다고 전해져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건물의 구조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의 다포계에 주심포계와 절충한 양식을 하고 있어 조선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공포는 외1출목내출목의 형식으로 내부는 판상이고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불단에는 삼존의 좌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큰 보 밑에 간주를 세워 후불벽을 구성한 특징은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주불인 약사여래좌상은 건칠불로 알려져 있으며 유리보전 현판의 글씨는 공민왕(恭愍王)의 친필로 전해진다.
오늘날에는 청량사의 유리보전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연대사(蓮臺寺)의 부속건물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사는 경내의 부속건물을 비롯한 대소 30여 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큰 사찰이었다.
창건연대는 신라 문무와 3년(663) 원효대사 또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구전될 뿐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건물이 오래되고 무너져 1755년 산 입구로 이건되었고, 이 때 그 터에 불전 하나가 홀로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남아있었다는 불전 하나가 유립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사는 이건된 후 다시 폐사되어 터만 남게 되었고 청량산의 사찰은 유리보전을 중심전각으로 하는 청량사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현재 유리보전은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증.개축하였다고 전해져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건물의 구조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의 다포계에 주심포계와 절충한 양식을 하고 있어 조선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공포는 외1출목내출목의 형식으로 내부는 판상이고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불단에는 삼존의 좌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큰 보 밑에 간주를 세워 후불벽을 구성한 특징은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주불인 약사여래좌상은 건칠불로 알려져 있으며 유리보전 현판의 글씨는 공민왕(恭愍王)의 친필로 전해진다.
학소대(鶴巢臺)
청량사 서편 입구인 낙동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절벽이 솟아 푸른 강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산구곡(陶山九曲) 중 제9곡인 청량곡(淸凉曲)을 일컫는다. 예로부터 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서식하였다고 하여 학소대라 한다.
금강대(金剛臺)
청량사 동편 입구인 낙동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금강대는 청량사 입구 계곡을 사이에 두고 학소대와 좌우로 갈라져 또 하나의 비경을 이룬다. 금가애에 오르면 산발치를 감싸안고 흘러가는 낙동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금강대 주위에는 금강굴이 있다.
청량사 서편 입구인 낙동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절벽이 솟아 푸른 강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산구곡(陶山九曲) 중 제9곡인 청량곡(淸凉曲)을 일컫는다. 예로부터 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서식하였다고 하여 학소대라 한다.
금강대(金剛臺)
청량사 동편 입구인 낙동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금강대는 청량사 입구 계곡을 사이에 두고 학소대와 좌우로 갈라져 또 하나의 비경을 이룬다. 금가애에 오르면 산발치를 감싸안고 흘러가는 낙동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금강대 주위에는 금강굴이 있다.
김생(金生)과 청량봉녀(淸凉縫女) 설화
김생이 경일봉 아래 바위굴에서 글씨공부에 전념한지 9년만에 명필이 되었다는 자신감을 갖고 하산하려 하였다. 그 때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쌈 솜씨와 김생의 글씨 솜씨를 겨루어 보자고 제의 하였다. 그 처녀는 바로 청량봉녀였다. 그래서 굴 속에서 불을 끄고 서로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윽고 불을 켜고 비교해 보니 처녀가 짠 천은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하였는데 김생의 글씨는 그만큼 고르지 못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김생이 1년을 더 공부하여 10년을 채운 뒤 명필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다고 한다.
김생이 경일봉 아래 바위굴에서 글씨공부에 전념한지 9년만에 명필이 되었다는 자신감을 갖고 하산하려 하였다. 그 때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쌈 솜씨와 김생의 글씨 솜씨를 겨루어 보자고 제의 하였다. 그 처녀는 바로 청량봉녀였다. 그래서 굴 속에서 불을 끄고 서로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윽고 불을 켜고 비교해 보니 처녀가 짠 천은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하였는데 김생의 글씨는 그만큼 고르지 못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김생이 1년을 더 공부하여 10년을 채운 뒤 명필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다고 한다.
'청량지문'을 지나서 청량산으로 가는 도로변에도 시비들이 서 있었다.
淸凉山歌(청량산가)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물따라 가지 말라 어자(漁子)알가 하노라
淸凉山歌(청량산가)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날 속이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물따라 가지 말라 어자(漁子)알가 하노라
청량폭포 주차장
遊山何所得(유산하소득) 如農自有秋(여농자유추)
歸來舊書室(귀래구서실) 靜對香烟浮(정대향연부)
猶堪作山人(유감작산인) 幸無塵世憂(행무진세우)
李滉(이황)
산을 유람하며 무엇을 얻었나
농부가 가을 수확이 있는 듯하네
전에 있던 서실로 돌아와
조용히 향연을 마주했네
그래도 산사람 되어서
요행히 속세의 우환을 당하지 말았으면
歸來舊書室(귀래구서실) 靜對香烟浮(정대향연부)
猶堪作山人(유감작산인) 幸無塵世憂(행무진세우)
李滉(이황)
산을 유람하며 무엇을 얻었나
농부가 가을 수확이 있는 듯하네
전에 있던 서실로 돌아와
조용히 향연을 마주했네
그래도 산사람 되어서
요행히 속세의 우환을 당하지 말았으면
청량사 주차장. 차량 절대 진입금지.
淸凉山 淸凉寺(청량산 청량사)
앞서 보았던 淸凉山歌(청량산가)와 같은 내용이지만 옛 한글형태로 되어있다.
淸凉山歌(청량산가)
淸凉山(청량산) 六六峯(육륙봉)을 아는 이는 나와 白鷗(백구)로다
白鷗(백구)야- 어떠하랴 못 믿을 손 桃花(도화)로다
桃花(도화)야- 물 따라 가지마라 뱃사공 알까 하노라
淸凉山歌(청량산가)
淸凉山(청량산) 六六峯(육륙봉)을 아는 이는 나와 白鷗(백구)로다
白鷗(백구)야- 어떠하랴 못 믿을 손 桃花(도화)로다
桃花(도화)야- 물 따라 가지마라 뱃사공 알까 하노라
何處無雲山(하처무운산) 淸凉更淸絶(청량경청절)
亭中日延望(정중일연망) 淸氣透人骨(청기투인골)
李滉(이황)
어느 곳인들 구름 낀 산이 없으랴마는
청량산이 더더욱 청절하다네
정자에서 매일 먼 곳을 바라보면
맑은 기운이 뼈까지 스며든다네
亭中日延望(정중일연망) 淸氣透人骨(청기투인골)
李滉(이황)
어느 곳인들 구름 낀 산이 없으랴마는
청량산이 더더욱 청절하다네
정자에서 매일 먼 곳을 바라보면
맑은 기운이 뼈까지 스며든다네
東立雲宵十二峰(동립운소십이봉) 天池扶出玉芙蓉(천지부출옥부용)
攀崖卽上高高頂(반애즉상고고정) 萬里群山一眼中(만리군산일안중)
김환(金瑍)
동쪽 하늘에 솟은 열 두 봉우리
천지에 피어 오른 아름다운 연꽃과 같네
벼랑을 부여잡고 높은 꼭대기에 올라보니
수만리 여러 산이 눈 아래에 펼쳐지네
攀崖卽上高高頂(반애즉상고고정) 萬里群山一眼中(만리군산일안중)
김환(金瑍)
동쪽 하늘에 솟은 열 두 봉우리
천지에 피어 오른 아름다운 연꽃과 같네
벼랑을 부여잡고 높은 꼭대기에 올라보니
수만리 여러 산이 눈 아래에 펼쳐지네
저곳이 입석주차장에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이다.
청량산 12봉, 청량산 대, 청량산 굴, 청량산 우물/폭포
청량정자(淸凉精舍). 청량사에서 응진전으로 가는 도중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산당(五山堂)이라고도 한다. 퇴계 이황의 남긴 뜻을 받들어 사람들이 논의하여 조선 순조 32년(1832)에 창건되었다. 그 후로 이곳은 퇴계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학자들의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되었고, 1896년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청량정자(淸凉精舍). 청량사에서 응진전으로 가는 도중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산당(五山堂)이라고도 한다. 퇴계 이황의 남긴 뜻을 받들어 사람들이 논의하여 조선 순조 32년(1832)에 창건되었다. 그 후로 이곳은 퇴계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학자들의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되었고, 1896년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주차장옆에 있는 큰 바위. 이 바위때문에 이곳의 지명이 입석주차장이다.
입석(立石)
淸凉山歌(청량산가)
淸凉山 六六峰(청량산 육육봉)을 아나니
난 나와 白鷗(백구)-로다
白鷗(백구)-야 엇더하랴
못 밋들손 桃花(도화)- 로다.
桃花(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舟子(주자)-알가 하노라
淸凉山歌(청량산가)
淸凉山 六六峰(청량산 육육봉)을 아나니
난 나와 白鷗(백구)-로다
白鷗(백구)-야 엇더하랴
못 밋들손 桃花(도화)- 로다.
桃花(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舟子(주자)-알가 하노라
聞說金剛勝(문설금강승) 此生遊未嘗(차생유미상)
淸凉卽其亞(청량즉기아) 呼作小金剛(호작소금강)
권성구(權聖矩)
금강산 좋다는 말 듣기는 해도
여태껏 살면서도 가지 못했네
청량산은 금강산에 버금가니
자그마한 금강이라 이를 만하지
淸凉卽其亞(청량즉기아) 呼作小金剛(호작소금강)
권성구(權聖矩)
금강산 좋다는 말 듣기는 해도
여태껏 살면서도 가지 못했네
청량산은 금강산에 버금가니
자그마한 금강이라 이를 만하지
원효대사 구도의 길. 청량사 1.3km
완만하게 위쪽이 아니고 옆으로 가는 길이다.
낙석때문에 철망이 쳐진 뒷편에 작은 둥굴같은 것이 있다.
마음 한번 다잡아 먹고
오늘 청량산을 찾아주신 님
잠시 숨을 돌리고
눈들어 암벽을 처다보세요
저 험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도
저렇게 살아남은 저 나무가
척박한 환경이나 탓했더라면
지금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을 탓하고 포기하기 전에
마음 한번 다잡아 먹고
한번 해보자 노력한다면
우리의 인생도
좀 더 나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요
오늘 청량산을 찾아주신 님
잠시 숨을 돌리고
눈들어 암벽을 처다보세요
저 험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도
저렇게 살아남은 저 나무가
척박한 환경이나 탓했더라면
지금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을 탓하고 포기하기 전에
마음 한번 다잡아 먹고
한번 해보자 노력한다면
우리의 인생도
좀 더 나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요
갈림길. 청량사까지 1km
손쉬운 가파른 오르막길도 있다.
갑자기 내려가는 계단
일제강점기때 송진 채취의 흔적
시대의 상처를 안고 자라는 소나무
[V] 모양의 깊게 패인 이 상처는 일제말기(1943~45년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에너지원인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상처에 의해 생장이 어려워진 소나무는 이 나무처럼 꿋꿋하게 자라기도 하지만 솔잎혹파리 등의 병충해에 약하여 쉽게 죽기도 합니다.
[V] 모양의 깊게 패인 이 상처는 일제말기(1943~45년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에너지원인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상처에 의해 생장이 어려워진 소나무는 이 나무처럼 꿋꿋하게 자라기도 하지만 솔잎혹파리 등의 병충해에 약하여 쉽게 죽기도 합니다.
안내판을 지나 내려가다보니 송진채취 흔적의 소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다시 옆으로 가는 길이었다.
소나무 사이로 청량사가 보인다.
저곳이 '청량정사'로 보인다. 입석주차장에서 이곳까지 걸린 시간은 30분 조금 넘었다.
솟대와 시 그리고 나그네. 솟대와 시인. 청량산 도립공원 산꾼의 집 김성기 시인.
'청량정사'의 현판이 보이지만 안내판은 밖인 '산꾼의 집'안에 있다.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도 없다
카메라 줌을 통해서 안내판을 촬영할 수 밖에 없었다.
카메라 줌을 통해서 안내판을 촬영할 수 밖에 없었다.
봉화 청량정사
청량정사는 청량산 연화봉과 금탑봉 사이에 자리잡은 정자이다. 조선 중종때 문신 송재 이우(1469~1517)선생이 건립하였다. 선생이 조카인 이해와 이황 및 사위인 조효연, 오언의 등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후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 청량정사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김성일, 유성룡, 정구 등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또한 '도산십이곡'도 이곳에서 저술하였다. 순조 32년(1832)에 와서 퇴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에서 정자를 중수하였다. 이후 청량정사는 퇴계 선생의 뜻을 기리는 많은 후학들이 찾아와 학문을 수양하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구한말에는 청량의진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일본군의 방화로 인해 1896년에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창한 것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집이다. 평면은 마루방 2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지숙료가 있고, 우측에는 운루런을 두었다. 마루방은 전면에 사분합 들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호는 오산당이고 문은 유정문이며, 현판 글씨는 조선 말기의 서예가 해사 김성근 선생이 썼다.
청량정사는 청량산 연화봉과 금탑봉 사이에 자리잡은 정자이다. 조선 중종때 문신 송재 이우(1469~1517)선생이 건립하였다. 선생이 조카인 이해와 이황 및 사위인 조효연, 오언의 등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후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 청량정사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김성일, 유성룡, 정구 등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또한 '도산십이곡'도 이곳에서 저술하였다. 순조 32년(1832)에 와서 퇴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에서 정자를 중수하였다. 이후 청량정사는 퇴계 선생의 뜻을 기리는 많은 후학들이 찾아와 학문을 수양하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구한말에는 청량의진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일본군의 방화로 인해 1896년에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창한 것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집이다. 평면은 마루방 2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지숙료가 있고, 우측에는 운루런을 두었다. 마루방은 전면에 사분합 들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호는 오산당이고 문은 유정문이며, 현판 글씨는 조선 말기의 서예가 해사 김성근 선생이 썼다.
청량정사을 지나자 부러진 고목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고목(느티나무)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나무속에 한국인 여자를 넣어서 불태워
죽인 가슴아픈 역사를 간직한 600년 된 나무로 2019년 7월 12일 새벽 호우로 이곳에
쓰러져 누워 있습니다.
- 청량산관리사무소 -
죽인 가슴아픈 역사를 간직한 600년 된 나무로 2019년 7월 12일 새벽 호우로 이곳에
쓰러져 누워 있습니다.
- 청량산관리사무소 -
說禪堂(설선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