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산129-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천보락 의병장군 기념비
여기 조국을 위해 큰 공을 세우고 가문을 빛낸이가 계시니 그가 바로 화산군 휘 만리님의 12세손인 천보락장군이다. 그의 어버이는 석귀공과 창녕성씨인데 산같이 큰 범 꿈을 꾸고 임자(1852년) 9월 15일 이곳 문경군 문경읍 관음리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기골이 장대하고 호안의 위용은 향토가 공인하는 장재였다. 6세에 서당에 입학 이종산선생께 사사하니 8세에 통감 세권을 통독한 수재로서 꾸준히 학문과 병서를 익혀 지덕을 겸비하였다. 순종조 음참봉이 되었고 1895년 명성황후가 왜적에게 시해되자 의혈로 멸왜구국을 맹세하고 서울로 가던중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장군 휘하 규격장 운강 이강년장군을 만나 선봉장이 되어 수안보와 조령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시세불리하여 유장군이 만주땅 요동으로 떠나자 의병은 흐트졌다. 그후 적정을 살피며 기회를 보던중 1905년 을사조약게 분개한 이강년장군이 영남 호서지방을 근거로 의병을 모으니 천장군도 합세하여 청풍과 단양에서 크게 적을 무찌른 공으로 1906년 의병 48진이 모인 제천에서 이강년장군이 도창의대장에 추대되고 천장군은 좌익장이 되었다. 이윽고 갈평전투에서 왜장 과전삼태랑등 십수명을 사살하고 죽령에서도 큰 승리를 하니 전군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1908년 강원도 민긍호장군이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강원도로 나아가 백담사 강릉 양양등 영동땅 왜적을 무찌르고 다시 남하하여 안동과 내성에서 큰 공을 세우는등 동벌서토 용맹을 떨치더니 청풍 작성전투에서 이장군이 부상으로 체포되자 잔병을 수습하여 도창이대장 이강년을 대역 통한을 품고 금강산을 거쳐 만주로 가신뒤로는 생사를 알길이 없다. 만시지탄이나 다행히도 향토사에 밝으신 평천리 전주 유성 3씨께서 장군의 공적을 발굴 관계기관에 고증함으로써 광복 45주년인 1990년 8월 15일에야 노태우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에 전문중이 성금을 모아 이듬해 3월 30일 기적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올렸다.향후 매년 장군의 생신일인 9월 15일에 후손들이 단배를 올리며 관리 보존하고 있다.
뛰어난 용맹으로 큰공 세웠네 겨레의 가슴마다 애국심 심고 한 맺힌 이국 충혼 구천에서도 이나라 기틀의 큰 빛 되시리
여기 조국을 위해 큰 공을 세우고 가문을 빛낸이가 계시니 그가 바로 화산군 휘 만리님의 12세손인 천보락장군이다. 그의 어버이는 석귀공과 창녕성씨인데 산같이 큰 범 꿈을 꾸고 임자(1852년) 9월 15일 이곳 문경군 문경읍 관음리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기골이 장대하고 호안의 위용은 향토가 공인하는 장재였다. 6세에 서당에 입학 이종산선생께 사사하니 8세에 통감 세권을 통독한 수재로서 꾸준히 학문과 병서를 익혀 지덕을 겸비하였다. 순종조 음참봉이 되었고 1895년 명성황후가 왜적에게 시해되자 의혈로 멸왜구국을 맹세하고 서울로 가던중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장군 휘하 규격장 운강 이강년장군을 만나 선봉장이 되어 수안보와 조령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시세불리하여 유장군이 만주땅 요동으로 떠나자 의병은 흐트졌다. 그후 적정을 살피며 기회를 보던중 1905년 을사조약게 분개한 이강년장군이 영남 호서지방을 근거로 의병을 모으니 천장군도 합세하여 청풍과 단양에서 크게 적을 무찌른 공으로 1906년 의병 48진이 모인 제천에서 이강년장군이 도창의대장에 추대되고 천장군은 좌익장이 되었다. 이윽고 갈평전투에서 왜장 과전삼태랑등 십수명을 사살하고 죽령에서도 큰 승리를 하니 전군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1908년 강원도 민긍호장군이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강원도로 나아가 백담사 강릉 양양등 영동땅 왜적을 무찌르고 다시 남하하여 안동과 내성에서 큰 공을 세우는등 동벌서토 용맹을 떨치더니 청풍 작성전투에서 이장군이 부상으로 체포되자 잔병을 수습하여 도창이대장 이강년을 대역 통한을 품고 금강산을 거쳐 만주로 가신뒤로는 생사를 알길이 없다. 만시지탄이나 다행히도 향토사에 밝으신 평천리 전주 유성 3씨께서 장군의 공적을 발굴 관계기관에 고증함으로써 광복 45주년인 1990년 8월 15일에야 노태우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에 전문중이 성금을 모아 이듬해 3월 30일 기적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올렸다.향후 매년 장군의 생신일인 9월 15일에 후손들이 단배를 올리며 관리 보존하고 있다.
뛰어난 용맹으로 큰공 세웠네 겨레의 가슴마다 애국심 심고 한 맺힌 이국 충혼 구천에서도 이나라 기틀의 큰 빛 되시리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산 129-3 의병 좌익장군 영양 천공보락 기적비를 찾아왔다.
의병좌익장군 천보락 약사
의병 좌익장군 천보락은 공의 부친 천석귀와 모친 창녕성씨 사이의 6형제 중 4남으로 1852년 9월 15일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남달리 기골이 장대하고 호안의 위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을 풍기는 풍모였다. 일찍이 학문에 열중하여 사서삼경 및 병서를 통독하고 용력과 지덕을 두루 갖춘 수재의 선비였다. 고종황제 때 경릉참봉이 되고 지역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국운이 쇠퇴하여 1894년 8월 2일 명성황후가 일인에 의해 시해되자 의혈로 멸왜 구국을 맹서하고 운강 이강년 의병 전국 도창의대장 휘하에서 좌익장군이 되어 경상도 북부와 충청도, 강원 등지에서 왜병을 섬멸하는데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런 중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의 의병들은 더욱 비분강개하여 총 궐기로 왜적에 항전하니 처처에서 전공을 세웠다. 공은 문경, 갈평, 조령전투에서 맹활약하였으며, 갈평전투에서 왜정 과전삼태랑을 사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국치의 한일 합방이 체결되자 통한을 품고 가솔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공은 빼앗긴 조국의 원한을 가슴에 안은 채 망명지 만주 땅에서 1942년 12월 9일 조국의 조국의 광복을 애타게 그리며, 향년 90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광복 45주년을 기하여 1990년 8월 15일 공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1995년 6월 21일 중국 요령성으로부터 공의 유해를 봉환하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치하였다가 그해 6월 23일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에 안장하여 공의 애국충절을 기리게 되었다. 한편 공의 고향 문경 관음에서는 1991년 3월 30일 지역 유림회 대표 고 류성삼선생이 당시 추진위원장이 되어 여기에 공의 기적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본 기적비는 2003년 9월25일 국가 보훈처에서 현충시설(관리번호 : 31-1-45)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의병 좌익장군 천보락은 공의 부친 천석귀와 모친 창녕성씨 사이의 6형제 중 4남으로 1852년 9월 15일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남달리 기골이 장대하고 호안의 위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을 풍기는 풍모였다. 일찍이 학문에 열중하여 사서삼경 및 병서를 통독하고 용력과 지덕을 두루 갖춘 수재의 선비였다. 고종황제 때 경릉참봉이 되고 지역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국운이 쇠퇴하여 1894년 8월 2일 명성황후가 일인에 의해 시해되자 의혈로 멸왜 구국을 맹서하고 운강 이강년 의병 전국 도창의대장 휘하에서 좌익장군이 되어 경상도 북부와 충청도, 강원 등지에서 왜병을 섬멸하는데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런 중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의 의병들은 더욱 비분강개하여 총 궐기로 왜적에 항전하니 처처에서 전공을 세웠다. 공은 문경, 갈평, 조령전투에서 맹활약하였으며, 갈평전투에서 왜정 과전삼태랑을 사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국치의 한일 합방이 체결되자 통한을 품고 가솔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공은 빼앗긴 조국의 원한을 가슴에 안은 채 망명지 만주 땅에서 1942년 12월 9일 조국의 조국의 광복을 애타게 그리며, 향년 90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광복 45주년을 기하여 1990년 8월 15일 공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1995년 6월 21일 중국 요령성으로부터 공의 유해를 봉환하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치하였다가 그해 6월 23일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에 안장하여 공의 애국충절을 기리게 되었다. 한편 공의 고향 문경 관음에서는 1991년 3월 30일 지역 유림회 대표 고 류성삼선생이 당시 추진위원장이 되어 여기에 공의 기적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본 기적비는 2003년 9월25일 국가 보훈처에서 현충시설(관리번호 : 31-1-45)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義兵左翼將穎陽千普洛紀績碑(의병좌익장 영양 천보락 기적비)
紀績碑銘幷序(기적비명병서)
나라가 어려우면 나무 아래서 글 읽던 선비가 붓을 던지고 창을 잡아 의를 받들고 적을 토벌하여 위급한 날에 종사를 구하고저 끓는 물, 타는 불속에라도 뛰어들어 그 한몸을 돌보지 않는 이의 수가 하나가 아니로되 穎陽千公이 그 중의 한분이다. 살펴보건데 공의 이름은 보락이요, 자는 선경(善慶)이며 음직으로 참봉을 하였으니 화산군(花山君) 이름 만리(萬里)의 12세손이다.
철종임자(哲宗壬子:1852) 9월 15일에 관음리 집에서 출생하니 자질이 영특하고 센 힘은 사람들을 능가하였다. 을미(乙未:1895)년 운강선생(雲崗先生) 이공(李公) 강년(康秊)이 농암에서 창의를 함에 그 의군에 같이 참가하여 고모산성에서 적을 쳤으나 불리함에 운강옹을 따라 제천으로 가서 의암선생유공의 막하에 선봉장이 되어 새재에서 적을 막다가 몇 달 뒤에 의병이 흩어지고 병신(丙申:1896)에 유옹(柳翁)은 서쪽으로 만주땅에 들어가고 공은 산중에 숨어서 적의 정세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 12년 뒤인 정미(丁未:1907)년에 운강선생이 다시 의로운 군사를 제천에서 일으킴에 좌익장이 되어 남쪽을 치고 북쪽을 토벌할 때에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베고 얻음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패배한 일 또한 많았다. 무신(戊申:1908) 6월에 청풍 백석동에 이르러 운강옹이 탄환을 맞고 잡히어 9월에 경성감옥에서 순국하고 큰아들 승재도 또한 길 위에서 짐살 당하니 철천의 한을 머금고 행장을 꾸려 만주땅으로 건너간 다음해에 나라도 따라서 망했도다.
아아… 슬프구나, 36년만인 을유(乙酉:1945) 7월에 광복이 되고 그 뒤 45년만인 경오(庚午:1990) 8월에 보훈처로부터 선열을 포상하니 건국훈장애국장이 주어졌다. 재종손 한봉(漢鳳)이 일가들과 수의하여 기적비를 고향마을 길위에 세우기로 하고 종증손 기성, 기원이 나를 집으로 찾아와 새길 글을 청하니 정성스러움에 감동하여 늙었다고 거절치 못하고 전후실적을 간략하게 쓰고 이어서 써 새겨 이르나니,
선비의 원기는 인륜과 강상에 독실함이다.
어진 조정이 배양하여 예의 바른 동쪽나라인데
나라 운수가 비색하니 섬 오랑캐가 침략하여
대궐에 들어와 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협박하여 조약을 이루니
산과 물에는 비바람이 치고 피는 팔도를 물들였다.
운강옹과 의지하여 의를 집고 격문을 띠우고
단을 모아 모여서 맹세하니 여러 군사가 춤추며 뛰어올 때
공께서도 그 의려에 참가하여 좌익장이 되어
죽음을 맹서하고 앞으로 몰아 달려 남쪽을 치고 북쪽을 토벌할적에
비는 옷 갓을 적시고 산골짜기에서 이슬 맞으며 잦도다.
외로운 군사는 목숨을 다해 베이고 잡은 것은 많기도 하였다.
운수인 것을 어찌하리 별은 경성감옥에 떨어졌다.
한을 머금고 만주땅에 건너가니 마침내 사옥에 이르렀다.
선열로 포상받아 비를 세워 기적하니
갈평의 양지요 대미산의 기슭이다.
영결한 이름 세상에 남아 있으니 돌은 더불어 갈라지지 못하리라.
나라가 어려우면 나무 아래서 글 읽던 선비가 붓을 던지고 창을 잡아 의를 받들고 적을 토벌하여 위급한 날에 종사를 구하고저 끓는 물, 타는 불속에라도 뛰어들어 그 한몸을 돌보지 않는 이의 수가 하나가 아니로되 穎陽千公이 그 중의 한분이다. 살펴보건데 공의 이름은 보락이요, 자는 선경(善慶)이며 음직으로 참봉을 하였으니 화산군(花山君) 이름 만리(萬里)의 12세손이다.
철종임자(哲宗壬子:1852) 9월 15일에 관음리 집에서 출생하니 자질이 영특하고 센 힘은 사람들을 능가하였다. 을미(乙未:1895)년 운강선생(雲崗先生) 이공(李公) 강년(康秊)이 농암에서 창의를 함에 그 의군에 같이 참가하여 고모산성에서 적을 쳤으나 불리함에 운강옹을 따라 제천으로 가서 의암선생유공의 막하에 선봉장이 되어 새재에서 적을 막다가 몇 달 뒤에 의병이 흩어지고 병신(丙申:1896)에 유옹(柳翁)은 서쪽으로 만주땅에 들어가고 공은 산중에 숨어서 적의 정세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 12년 뒤인 정미(丁未:1907)년에 운강선생이 다시 의로운 군사를 제천에서 일으킴에 좌익장이 되어 남쪽을 치고 북쪽을 토벌할 때에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베고 얻음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패배한 일 또한 많았다. 무신(戊申:1908) 6월에 청풍 백석동에 이르러 운강옹이 탄환을 맞고 잡히어 9월에 경성감옥에서 순국하고 큰아들 승재도 또한 길 위에서 짐살 당하니 철천의 한을 머금고 행장을 꾸려 만주땅으로 건너간 다음해에 나라도 따라서 망했도다.
아아… 슬프구나, 36년만인 을유(乙酉:1945) 7월에 광복이 되고 그 뒤 45년만인 경오(庚午:1990) 8월에 보훈처로부터 선열을 포상하니 건국훈장애국장이 주어졌다. 재종손 한봉(漢鳳)이 일가들과 수의하여 기적비를 고향마을 길위에 세우기로 하고 종증손 기성, 기원이 나를 집으로 찾아와 새길 글을 청하니 정성스러움에 감동하여 늙었다고 거절치 못하고 전후실적을 간략하게 쓰고 이어서 써 새겨 이르나니,
선비의 원기는 인륜과 강상에 독실함이다.
어진 조정이 배양하여 예의 바른 동쪽나라인데
나라 운수가 비색하니 섬 오랑캐가 침략하여
대궐에 들어와 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협박하여 조약을 이루니
산과 물에는 비바람이 치고 피는 팔도를 물들였다.
운강옹과 의지하여 의를 집고 격문을 띠우고
단을 모아 모여서 맹세하니 여러 군사가 춤추며 뛰어올 때
공께서도 그 의려에 참가하여 좌익장이 되어
죽음을 맹서하고 앞으로 몰아 달려 남쪽을 치고 북쪽을 토벌할적에
비는 옷 갓을 적시고 산골짜기에서 이슬 맞으며 잦도다.
외로운 군사는 목숨을 다해 베이고 잡은 것은 많기도 하였다.
운수인 것을 어찌하리 별은 경성감옥에 떨어졌다.
한을 머금고 만주땅에 건너가니 마침내 사옥에 이르렀다.
선열로 포상받아 비를 세워 기적하니
갈평의 양지요 대미산의 기슭이다.
영결한 이름 세상에 남아 있으니 돌은 더불어 갈라지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