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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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387
탐방로그
강원도 홍천은 스스로 무궁화 고장이라 할 만큼 무궁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지역이다. 무궁화 동산을 건립하고 각종 문화행사를 통하여 무궁화 정신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이 애정이 남궁억 선생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의 활동들을 기억하기 위해 남궁억 기념관을 찾았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동상과 3.1독립운동기념탑은 홍천읍 연봉리 무궁화공원 내에도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서 남궁억 선생 상은 1978년 9월 1일 홍천군 북방면 구만국민학교장 정용섭이 교정에 세웠던 것을 무궁화 사랑·나라 사랑 정신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이곳에 옮겨 세움.
2006. 12. 29. 홍천군수 노승철
선생께서는 한말에 중요관직에 봉직하시다가 1896년에 사퇴하시고 독립협회의 창립을 시작으로 구국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셨다. 특히 1910년에 이르러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탄되자 신세대교육을 결심하시고 배화학당 교사가 되어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 고취와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쓰셨다. 1914년에 출판중인 한글서체 법첩을 일본 경찰에게 압수당하자 선생께서는 그 일부를 배화학당 석탄 창고에 몰래 묻어두었는데 이철경 이미경씨가 이를 발굴하여 연구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한글 궁서체의 기본으로서 다양하게 발전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아아 선생께서 구국을 위해 하신 일들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랴. 다만 그 일부 흔적이나마 우리 후손들이 마음에 새겨 귀감을 삼을 수 있다면 여기에 선생이 남기신 필적을 돌에 옮긴 의의가 더욱 빛날 것이다.

서기 2002년 7월 후학 조용구 삼가 세움
한서 남궁억 선생 3.1운동 근인 어록비
1918년 12월 20일 서울에서 길이 험하고 산이 높은 이곳 모곡리에 내려오신 선생은 몸이 좋지 못하여 이듬해 일어난 3.1운동의 선봉에 서지 못하였다. 하지만 곧 몸을 추슬러서 동민들을 모아 민족의 독립은 선언하고 아래와 같이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근인)을 설파하셨다.
이는 선생의 독립사상과 의지가 일시적인 감상이 아닌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이 부당한 것임과 우리 한민족의 독립사상과 의자가 결연한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에 3.1독립선언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한 선생의 선언을 요약하여 비에 새긴다.
3.1운동의 근인
1. 대한인의 독립사상이 유별한 까닭이다.
2. 일본의 무단통치가 가혹하기 때문이다.
3. 일본의 위선과 압제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가 격하기 때문이다.
4. 대한인의 정치 행정상 참여가 불가하기 때문이다.
5. 대한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노골적이고 부당하기 때문이다.
6. 대한인의 언론과 출판과 집회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7. 종교에 대한 간섭과 핍박이 부당하기 때문이다.
8. 대한인의 의식과 개혁에 대한 경계와 박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9. 대한인의 토지를 강탈하고 이민을 장려하기 때문이다.
10. 대한인의 도덕적 타락을 유도하고 주입하기 때문이다.
11. 일본인의 거주를 위하여 한국인을 만주로 내몰기 때문이다.
12. 경제활동에 대한 수탈과 피해가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한서 남궁억 저 "조선이야기 5권"
조선 강탈을 위한 일본의 침략일지(일본 강점기 민족 독립운동)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역적들을 동원하여 황제의 어인도 없는 허위문서인 "한일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늑탈하였다. 이는 아래와 같이 일찍부터 계획하고 준비해온 일본의 치밀한 계략이었다.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을 비에 적어 남긴다.
1.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일수호) 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조선침략을 준비하였다.
2. 1894년 동학혁명 진압과 청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이 국모 시해와 단발령을 내려 민족이 분노하여 을미의병이 거병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의 조선 진주를 정당화하면서 조선강탈계획을 다져 나갔다.
3. 러일전쟁(1904~05년)에서 승전한 일본은 비밀리에 '포츠머스조약'(러·일·미 3국이 대한제국의 보호감독권을 일본에 주기로한 부당한 조약) 체결로 국제적 명분을 쌓은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늑탈(을사늑약)하였다.
4. 일본이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내정 감독권 강취 황제 폐위,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여 민족은 정미의병전쟁으로 응전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이런 일본의 국권늑탈에 대한제국 민중의 정당한 항거이자 인류평화 운동사의 신기원을 이룬 독립운동으로 중국과 인도 등 식민지 백성의 빛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후 1945년 8·15광복까지 일본의 압박과 박해, 강제징집과 위안부 강제동원과 자원의 수탈로 한반도에는 땅과 사람만 남아있었다.
1919년 3월~5월까지 독립운동 인적 피해 상황
사망자 7,500여명, 부상자 18,000여명, 구속자 47,000여명, 피검자 200,000여명
한서 남궁억 선생 3.1운동 근인 어록비
1918년 12월 20일 서울에서 길이 험하고 산이 높은 이곳 모곡리에 내려오신 선생은 몸이 좋지 못하여 이듬해 일어난 3.1운동의 선봉에 서지 못하였다. 하지만 곧 몸을 추슬러서 동민들을 모아 민족의 독립은 선언하고 아래와 같이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근인)을 설파하셨다.
이는 선생의 독립사상과 의지가 일시적인 감상이 아닌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이 부당한 것임과 우리 한민족의 독립사상과 의자가 결연한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에 3.1독립선언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한 선생의 선언을 요약하여 비에 새긴다.
3.1운동의 근인
1. 대한인의 독립사상이 유별한 까닭이다.
2. 일본의 무단통치가 가혹하기 때문이다.
3. 일본의 위선과 압제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가 격하기 때문이다.
4. 대한인의 정치 행정상 참여가 불가하기 때문이다.
5. 대한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노골적이고 부당하기 때문이다.
6. 대한인의 언론과 출판과 집회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7. 종교에 대한 간섭과 핍박이 부당하기 때문이다.
8. 대한인의 의식과 개혁에 대한 경계와 박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9. 대한인의 토지를 강탈하고 이민을 장려하기 때문이다.
10. 대한인의 도덕적 타락을 유도하고 주입하기 때문이다.
11. 일본인의 거주를 위하여 한국인을 만주로 내몰기 때문이다.
12. 경제활동에 대한 수탈과 피해가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한서 남궁억 저 〈조선이야기 5권〉
대한 독립을 위한 한서 남궁억 선생의 민족교육
일본 강점기 제3대 총독 재등실(齋藤實 - 사이토 마코토)은 아래와 같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인물을 폄하하고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는 고도의 한민족 분열정책으로 문화통치를 시작했다.
이에 한서 남궁억 선생은 일본의 음흉한 문화통치에 맞서 인물 중심의 “동사략”(1924년)과 사건 사화 중심의 “조선이야기”(1929년)를 저술하여 보급하셨다.
이는 선생의 무궁화 운동(우리 민족의 오천년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독립의 사상을 심고 가꾸고자 한 문화운동)과 함께 교육을 진정한 독립의 뿌리로 보고 헌신하신 선생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독립운동이었다.
민족 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세워진 전국의 사립학교와 교회에서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 이를 구입하여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독립의 사상과 의지를 심고 가꾸는데 사용하였다.
한서 남궁억 선생이 맞선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교육시책은 아래와 같다.
1. 한국 사람들의 일과 역사와 그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여 그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만들어야 한다.
2. 한민족의 모든 선인들의 무의무능, 악행들을 들추어 과장하여 가르침으로 조선 청년들이 조상을 경멸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라.
3. 그렇게 하면 그것이 점차 자아 혐오증으로 발전하게 되어 실망한 그들은 쉽게 우리의 미화된 가르침을 받아드려 조선을 버리고 일본인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일본의 사적, 인물,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광복 후 56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를 왜곡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선 침략과 강탈에 대하여 사과하거나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일본의 만행을 주시하며 일본 강점기 민족의 독립 을 위하여 묵묵히 교육자의 길을 가신 한서 남궁억 선생의 뜻을 새겨 이를 비에 새겨 남긴다.
한서 남궁억 기념관
한서 남궁억 상
한서 남궁억 상(1863.12.27-1939.4.5)
한서 남궁억 선생은 「독립협회」 설립과 「황성신문」의 창간 등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민계몽 운동과 무궁화 보급 운동을 전개하신 우리 겨레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근대사의 격량 속에서 불굴의 애국자로 생애를 마치신 분이다.
새롭게 복원된 예배당
모곡 예배당 복원 1919년 9월 한서 남궁억 선생께서 이곳에 예배당을 지으시고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무궁화 운동"을 전개하셨다. 1933년 11월 "무궁화 사건"으로 선생께서 구속되시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뜯겨 폐교된 것을 옛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강원 홍천군 서면 모곡리 387 한서 남궁억 기념관
한서 남궁억 기념관
한서 남궁억 선생 신도비
민족혼의 등대 한서 남궁 선생 신도비명 병서
배달민족이 이 땅에 자리를 잡은지 몇 천년동안 수많은 선열들이 이 민족의 강성과 발전을 위하여 피와 땀을 아끼지 않았다. 이 중에 민족의 등대요, 신문화의 선봉인 한 분이 계시니 이분이 바로 여기에 잠드신 한서 남궁 억 선생이다. 국제풍운이 험악 할 때 선생은 쓰러저 가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고 정치 언론 종교 교육운동에 진력하여 80평생을 구국 운동에 바친 것이다. 선생은 서기 1863년 12월 27일에 한성부 왜송동에서 출생하셨으니 성은 남궁 명은 억 자는 치만으로 본관은 함열이며 한서는 별호이다. 부는 중추도사 영이요 모는 덕수 이씨시다. 유시로 부터 가난한 편모 슬하에서 자라나면서 한문공부를 하다가 당시에 국제정세를 앞서보고 미국인이 경영하는 영어학교에 입학 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24세에 고종황제 어전통역으로 31세에는 담곡부사로 부임 했다가 그 이듬해 내부토목국장으로 전보 되었다. 재관당시 구식도시인 수도한성부를 근대부시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최초의 공원인 파고다 공원을 만들었으며 고루한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내의 도로를 확장하여 서울의 모습을 새롭게 하였으니 이것이 1895년의 일이다. 34세에 관계를 물러나 사회운동으로 구국의 길을 찾기 위하여 서재필선생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이어 동지와 독립신문을 발행 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 하다가 1898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일간지로는 처음으로 황성신문사를 창설하고 사장이 되어 민중을 계몽 하면서 불의의 친일파를 비롯한 사대파와 싸우면서 날카로운 필봉으로 민중의 목탁 노릇을 다 하였으니 선생이야 말로 언론계의 선각자이다. 40세에는 성주목사 그리고 이듬 해에는 이양군수로 재관하면서 부패한 고관들의 토색에 완강히 항거하고 얼울한 백성을 보호 하면서 교육과
조림 그리고 폐습 타파에 전력을 다하였다.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관계를 떠나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동협회 회장으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이어서 교육잡지 교육월보 등을 창간하니 이 역시 한국교육 잡지의 효시이다. 선생은 47세때에 관동학회를 조직하여 강원도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조선왕조의 사직이 무너지자 종교의 힘과 교육으로서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48세에는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아울러 배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곳에서 8년동안 일제의 악랄한 탄압 아래서도 우리의 역사, 언문체법, 가정교육, 무궁화지도, 육아법등의 책을 발간하고 많은 애국의 노래도 지었다. 선생이 56세 되던 해 일제의 강포는 날로 심해지고 민족적인 고통이 더욱 가중되자 울분의 심정을 말할길 없어 선향인 이 곳 심산궁곡 보리울을 찾아 낙향하였다 그러나 이 곳 에서도 선생은 깨우치지 못한 지방의 현실을 보고 한유하게 지낼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곧 이곳에 교회를 짓고 학교를 설립하여 민중계몽과 종교운동에 힘썼다. 낮에는 학교와 부락을 보살피고 밤이면 교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한편 조선이야기 동사략등을 집필 하는 등 뜨거운 정열을 쏟았다. 이때 설립한 학교가 한서중학교 한서국민학교의 전신인 연곡학교이다. 개화기 신교육기관인 학교가 이곳에 설립되자 각지에서 학생들이 운집하니 30~40대의 청, 장년으로 부터 각계각층의 제자들이 선생의 슬하로 모여들었다. 선생은 이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었고 의롭게 사는 길을 보여 주었다. 새벽이면 유리봉에 올라 「불의의 일본을 이땅에서 물리쳐 주소서」 이 민족에게 불의에 굴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일하러 가제, 기러기, 무궁화등 주는 이 강산을 무궁화 동산으로 꾸며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국생활의 최후에는 무거운 십자가가 지워졌으니 71세 되던 해 12월에 일제의 쇠사슬에 묶에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것이다. 재옥중에 일제의 모든 유감을 완강히 거절함으로 모진 고초를 받다가 병든 몸으로 풀려나와 향저에에서 신음하다가 77세 되던 서기 1939년 을유 4월 5일 파란만장의 일생을 마치시니 선생의 유해는 생전에 선생을 존경하고 따르던 여러 제자 유지들의 옷소매를 적시는 가운데 설밀 물마지(점말, 앞산) 선영하에 뫼시 었다가 일제가 물러간 후 1966년에 선생의 뜻이 숨쉬는 큰말 교회앞에 이장 하였으며 1977년에는 가우언도 도민의 정성과 정부의 보조로써 유서깊은 이곳 유리봉하에 또 이장하여 뫼시고 성역화 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생전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 거룩한 유덕으로 1962년에는 대한민국장을 그리고 1977년에는 건국국민장을 추증 받았다. 선생의 배위 양혜덕여사는 1866년 병인 9월 13일에 출생하여 1937년 정축 1월 20일에 유명을 달리 하였으며 이곳 선생의 유택에
합사하였다. 선생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담은 소년때 미국에 망명하여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장녀 숙향은 일찍이 홀로 되어 선생의 곁에서 구국운동 뒷바라지와 지극한 효성으로 임종 시까지 시탕하였다. 차녀 자향은 윤치호 선생의 차남 광선에게 출가하였다. 선생의 생애와 사상은 불의와 추호도 타협하지 않고 말보다 실천을 앞세웠으며 앞일을 헤아리는 혜안을 가지고 경륜이 원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1945년 조국의 광복 이후 제자들이 학교를 재건하고 각지에 동상을 세워 선생의 유덕을 기념하였고 금차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남궁씨 종중에서 대비를 마련했음으로 정성것 붓을 들어 선생을 뫼시던 그때를 회상하면서 삼가 선생의 위대한 행적을 여기에 옮긴다.

서기 1978년 무오 4월 5일 문하생 탄암 조용구 삼가 짓고 족제 취락재 남궁화 삼가 쓰다
한서 남궁억 선생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