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생가, 추모비, 박열 의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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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박열 의사 기념관
일본에서도 인권변호사로 TV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는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변호사
김지섭, 박열 의사를 변호했던 후세 다츠지 변호사 역시 우리나라로부터 2004년에 일본인으로 유일하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묘비에는 生きべくんば民衆と共に、死すべくんば民衆のために(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어서도 민중을 위하여)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 박열의사기념공원
박열 의사 생가

본래 태어나신 곳은 문경시 모전동이고, 그 후 이주하신 곳이 여기라고 한다.
박열 의사 생가지 /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8
이곳은 최초로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으며, 1923년 일본 왕자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려 한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검거되었던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1902~1974)가 태어난 집터이다. 23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 후 1946년 1월에 열린 "신조선건설동맹"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0월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이라는 기구를 만들고 단장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귀국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박열은 1974년 북한에서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북한의 발표에 의하면 당시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회장이었다고 한다.
의사 박열 선생 추모비
애국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않다. 하물며 일신의 안위가 걸려있을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일제에게 강탈당한 조국을 되찾기위하여 구국의 선봉에서 목숨을 들보지 아니하고 의열투쟁한 이곳출신의 위대한 애국선열이 있었으니 바로 박렬의사이다. 박의사는 1902년 2월 12일에 문경군 마성명 오천리에서 부 박지수씨와 모 정선동여사의 3남 1년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이고 혹천금당실 입향조이자 조선중종 이조정랑을 역임한 박종린공의 14대손이기도 하다. 이름은 어릴때부터 렬로 불렀으나 호적명은 준식이다. 천성이 강의하고 준영하며 의협심이 강했고 향학열이 높아 7세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함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이어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경성고보재학중 3.1운동에 가담한 때문에 퇴학을 당했고 바로 고향에 내려와서도 만세시위를 선도한 관계로 일제경찰의 수배를 당하여 이를 피해 1919년 10월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동경에서는 막노동을 하면서 와세다 메이지대학의 교외생이 되었고 또 어학전문학원인 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면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망국의 통분을 누를길없어 조선인 고학
생 동우회 의혈단 의거단 흑도회등을 조직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더욱 이 조선인학대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항의투쟁및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국제적 연대도 병행하면서 상해임시정부과도 긴밀한 연락을 지속하였다. 박의사는 또한 직접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회원들을 규합하여 흑우회와 부정사를 조직 강도높은 학렬투쟁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침략의 원흉이자 최고 수뇌인 일왕을 폭살하기 위하여 폭탄구입을 추진하던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거사가 수포로 돌아갔으니 민족적 통한이었다. 일제는 대재앙에 편승한 불온선인들이 비밀결사와 고관암살을 기도했다는 구실을 붙여 조선인 대검거를 단행하여 6600여명을 학살하고 주모자 박의사와 부인 금자문자여사를 체포한것이다. 금자문자여사는 박의사의 평생동지이자 반려자다. 일본여인이지만 조선인 유학생과 사상적으로 교류하면서 민족을 초월하여 박의사를 연모했고 함께 항일운동에 헌신하였다. 두사람은 1923년 10월 23일 대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되었다. 두사람이 재판에 임했던 태도는 의연하고 당당하였으니 재판전에 네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기를 나는 조선민족의 대표이니 천황의 대표인 재판장과 동격이기에 조선의 예복을 입게할것, 좌석은 재판장과 동등하게 할것, 재판전에 조선을 강탈한 강도행위를 탄핵하는 선언문을 읽게할것, 법정용어는 조선말을 사용하게 할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여 일부는 허용되는등 두사람의 옥중투쟁은 일본 조야를 뒤흔들었고 민족정기를 드높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금자문자여사는 도찌기형무소에서 교살당하여 향년 23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고 유언에 따라 박의사의 형 정식씨가 유골을 인수하여 문경읍 팔령산애 안장하였다. 박의사는 일제가 집요하게 황국신민화의 전향시도를 했으나 궆히지 않았고 유례가 드물게 23년동안 아키다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일제패망후 10월 27일에야 동포의 열열한 환영속에 석방되었다. 동경에 돌아와서는 신조선 건설동맹 위원장을 맡았고 김구선생의 부탁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사의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을 맡아 유해를 모국으로 봉환하였다. 이어서 박의사는 자신의 민족주의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하였고 범우파단체를 통한 재일거류민단을 발족시켜 초대단장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금자문자여사의 묘소를 참배하였고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에 영구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렀다가 6.25동란으로 납북되고 말앗으니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우리나라의 큰 불행이였다. 박의사는 1947년에 동경국제신문 기자인 장의숙여사와 재혼하여 슬하에 영일, 경희 남매를 두었고 장여사는 1976년에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박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생가는 경북도지방문화재로 지정했으며 사단법인 박렬의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추모행사를 펼치고 있으니 비록 늦기는 했지만 다행한 일이다. 그리하여 박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거룩한 투쟁행적이 현창되어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다면 누구나 애국하는 마음을 본받게 될것이니 그때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찬란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