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산27-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오정산(烏井山, 804.9m)은 문경시 호계면과 마성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산이다. 대미산에서 뻗은 한 줄기가 운달산, 조향령, 단산, 부운령을 지나 남으로 길게 뻗어 경북팔경중 일경인 진남교반에서 고모산성과 영남대로상 옛 모습이 남아 있는 토끼비리(토천)을 보며 산행을 할수 있다. 능선을 타고 오르면 영강이 진남교반을 휘감고 돌아가는 모습과 강옆을 따라가는 3번 도의 모습이 장관이다.
왼쪽은 옛 철도를 위한 터널을 새롭게 활용하는 것이었다.
鎭南門(진남문)
진남문을 들어가자 바로 안내판이 보였다. GPS 상의 주소는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산 27-2이다.
운강 이강년의 한말 의병항쟁과 고모산성
운강 이강년의 한말 의병항쟁과 고모산성
운강 이강년의 한말 의병항쟁과 고모산성
고모산성은 한말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병항쟁에 나선 운강 이강년선생의 전적지이다. 운강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이를 비통히 여겨 1896년 2월 23일 향리에서 창의하였다. 창의 후 운강은 농암장터(현 농암면 개바위)에서 단발령에 앞장선 안동부 관찰사와 순검 2명을 처단하였다. 이때 운강은 6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모곡(마성면 모곡리)을 거쳐 1896년 2월 26일 밤 고모산성으로 진군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고모산성은 태봉(함창읍 태봉리)과 수안보에 주둔한 일본군의 병참선상에 있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1896년 2월 27일 새벽 일본군과 관군의 기습공격으로 6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고모산성 안팎의 마을들이 모두 불에 타고, 지금도 그 흔적이 입구의 느티나무에 남아있다. 1907년 7월 일제가 강제로 문경으로 진군한 운강은, 신현(마성면 신현리)에 지휘소를 두고 고모산성에 방어진을 설치하였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 문경새재, 갈평, 동로 적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갈평에서는 일본군 1개 소대를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고모산성은 한말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병항쟁에 나선 운강 이강년선생의 전적지이다. 운강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이를 비통히 여겨 1896년 2월 23일 향리에서 창의하였다. 창의 후 운강은 농암장터(현 농암면 개바위)에서 단발령에 앞장선 안동부 관찰사와 순검 2명을 처단하였다. 이때 운강은 6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모곡(마성면 모곡리)을 거쳐 1896년 2월 26일 밤 고모산성으로 진군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고모산성은 태봉(함창읍 태봉리)과 수안보에 주둔한 일본군의 병참선상에 있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1896년 2월 27일 새벽 일본군과 관군의 기습공격으로 6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고모산성 안팎의 마을들이 모두 불에 타고, 지금도 그 흔적이 입구의 느티나무에 남아있다. 1907년 7월 일제가 강제로 문경으로 진군한 운강은, 신현(마성면 신현리)에 지휘소를 두고 고모산성에 방어진을 설치하였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 문경새재, 갈평, 동로 적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갈평에서는 일본군 1개 소대를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성에 있는 운강 이강년 의병장 활동지 안내판을 찾아왔다.
진남교반
진남교반 주변은 1933년 대구일보사의 경북팔경 투표 결과에 의해 제1경으로 선정된 곳이다. 이곳은 고모산성, 석현성, 고분군, 토끼비리, 성황당, 주막등 역사적,시기적으로 다양하게 유적이 산재하는 곳이다.
고모산성은 본성 1,256m, 익성 390m를 합해 총 1,646m에 이르는 산성이다. 성벽은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맞추어 축조하였는데, 축성 방식은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은 협축식과 바깥쪽만을 쌓은 편축식 축성법을 쓰고 있다.
축조 연대는 계립령로가 개통된 AD 156년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한 2세기 말 경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후삼국시대, 조선시대, 대한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증개축을 거듭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한 문헌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징비록','조선왕조실록' 등에 나타난다.
'징비록'의 기록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왜병이 몇 번의 정찰 후 지키는 군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춤추며 노래하고 지나갔다는 안타까운 기록이 전해져 온다. 또한 1896년 의병 전쟁시 운강 이강년 선생이 이곳에 격전을 벌였으며, 최근 6.25전쟁 때에도 중요한 방어 거점 지역이었다.
고모산성은 이 산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모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고부산성, 마고산성, 희양산성, 조령산성 등 많은 산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연이어 있는 영남대로의 험로인 토끼비리와 함께 자주 이야기되고 있다.
진남교반 주변은 1933년 대구일보사의 경북팔경 투표 결과에 의해 제1경으로 선정된 곳이다. 이곳은 고모산성, 석현성, 고분군, 토끼비리, 성황당, 주막등 역사적,시기적으로 다양하게 유적이 산재하는 곳이다.
고모산성은 본성 1,256m, 익성 390m를 합해 총 1,646m에 이르는 산성이다. 성벽은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맞추어 축조하였는데, 축성 방식은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은 협축식과 바깥쪽만을 쌓은 편축식 축성법을 쓰고 있다.
축조 연대는 계립령로가 개통된 AD 156년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한 2세기 말 경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후삼국시대, 조선시대, 대한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증개축을 거듭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한 문헌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징비록','조선왕조실록' 등에 나타난다.
'징비록'의 기록에 의하면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왜병이 몇 번의 정찰 후 지키는 군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춤추며 노래하고 지나갔다는 안타까운 기록이 전해져 온다. 또한 1896년 의병 전쟁시 운강 이강년 선생이 이곳에 격전을 벌였으며, 최근 6.25전쟁 때에도 중요한 방어 거점 지역이었다.
고모산성은 이 산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모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고부산성, 마고산성, 희양산성, 조령산성 등 많은 산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연이어 있는 영남대로의 험로인 토끼비리와 함께 자주 이야기되고 있다.
①동문지 ②남문지 ③서문지 ④북문지 ⑤서현성(진남문) ⑥주막거리 ⑦성황당 ⑧문경토끼비리 ⑨봉생정
⑩현위치 ⑪고분군 ⑫주차장
⑩현위치 ⑪고분군 ⑫주차장
고모산성 150m
문경토기비리 50m
문경토기비리 5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