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순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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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산54-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植 東植의 三男과 三女이오 泳弼은 雨植 榮植 辰植의 三男과 一女니 後孫이 繁衍하시다. 噫라 公은 風鹿乱世에 大議를 밝히고 網常을 바로잡아 祖國을匡復하려고 義旅의 陣頭에서 愛國貞忠의 丹誠을 다 하시고 끝내 節操를 지켜 樵夫의 生平를 마치시니 그 높고 거룩한 뜻을 우러러 기리고 되새겨 길이 빛내고자 後毘의 至誠으로 墓表를 세우고자 함에 馮據글을 請함으로 菲才로써 辞하였으나 갸륵한 精誠을 欽仰하여 僭越하나마 敢히 家狀에 馮據하여 이에 拙文을 씀에 다만 後日의 据摭을 바랄 뿐이다.
缶林 洪在烋 謹撰 子 泳鍝 謹書
독립유공자 민순호 의사의 묘 입구
주소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산 54-2이다.
독립지사 여흥민공 휘 순호지묘
獨立志士 閔愚焦之碑(독립지사 민우초지비)
救國 貞忠의 大義를 爲하여 丹心 生平을 마치신 閔公의 諱는 舜鎬요 字는 鳳來니 號를 愚樵라 하시다 그 先은 麗興人으로 始祖의 諱는 稱道니 麗朝에 尙衣奉御 이시오 그 後에 諱 漬은 壁上 三韓 功臣으로 謚가 文仁이니 公의 十九代祖 이시다.
朝鮮 純朝祖에 諱 祖榮은 司諫院正言 慶尙道都事를 歷仕 하시니 公의 高祖 이시다. 曾祖의 諱는 豊照요 祖의 諱는 光顯이며 考의 諱는 致一이니 仁川 蔡時萬의 따님을 맞이하여 檀紀 四二一八年 十月三日에 聞慶 身北面 平川里 第에서 公을 出生 하시다. 나면서부터 眉目이 빼어나고 聰明이 過人하여 七世에 入學하고 十五世에 能히 經學에 窮通하니 文名이 鄕內에 들날려 嶠下의 俊才로 囑望됨이 크시다. 때마침 烏夷가 侵寇하여 時俗이 煩擾하고 士風이 頹落하여졌으므로 閱遣의 뜻을 끊고 기우는 國運을 痛恨하여 奮然히 救國抗爭의 隊任에 參劃 할 決意를 굳게하고 雲岡 李康寕
先生의 幕下에 文官從事로 被任되어 秘密裡에 總參謀의 重責을 맡으시다. 義理를 鼓動함이 大事를 圖謀하는 急先務임을 主張하여 雲岡과 더불어 赦庵 柳麟錫 先生을 拜謁하고 大義를 請論하여 師弟의 誼를 맺으시고 家財를 틀어 大義名分을 밝히는 昭義新編을 刊行 하시다. 俊乂를 모아 兵書를 가르치라는 雲岡의 뜯을 받아 主屹山 萬壽洞에서 不避風雨 스스로 數間芳屋을 마련하여同志와 더불어 講學에 專念中 그 行跡이 드러나 危殆함을 알려주는 士友의 勸誘로 不得己 同志를 解散하고 本第로 돌아 오시다 厥後 雲岡과 더불어 擧義를 熟議하고 原洲隊長 閔肯鎬와 秘密裡에 교섭하여 肯養山 石窟에 많은 武器를 갈무려 丁未義旅를 大勝으로 이끄는데 이바지한 功이 크시다. 戊甲年에 雲岡이 殉義하자 同志와 더불어 復?討賊을 會盟하고 哉時日記와 秘密文書를 分散保管하고 主屹山 에 隱居하시다. 壬子年에는 賊徒의 눈을 避하여 完章里로 옮아와 里民의 禍를 免케하고 山水에 自娛하며 樵夫로 自足하여 耕稻하며 樵夫歌一? 을 지어 憂國衷情을 敍懷하고 後孫에게 訓誡하시다. 丁巳年 冬에는 ?患의 徵條를 堂糞으로 徵驗하여 禱天文을 지어 平復을 빌어시고 臨終에는 斷指獻血의 精誠을 다 하시며 居喪 三年에도 하루같이 省墓하는 至極한 誠孝는 이를데 없어시다. 己酉年 光復 後에는 雲岡先生紀念事業推進에 專念하여 哉史錄과 文集을 刊行하고 寤寐一念 綱常과 ?論을 바로잡아 社會秩序回復과 祖國統一의 成業成就를 祈願하다가 光榮에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乙巳年十一月十八日 完章里第에서 恬然히 逝世 하시니 完章里 법흥산 後麓에 安葬 하시다. 戊甲年 三月一日에 獨立有功者로 推選되어 大統領表彰狀이 追贈 되시다. 配는 全州李康寅의 女를 娶하시니 泳? 泳沂 泳弼 三男을 두시고 泳? 公의 伯氏 諱 仁鎬에게 出系하여 完植 正植 亨植 京植 忠植 孝植 洪植의 七男과 一女이오. 泳沂은 昌植 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