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길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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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632-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천시, 경북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1098 애국지사 구재 최학길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번지가 잘못된 것 같다. 찾을 수가 없다.
신안4리라는 것을 확인했다.
보훈처 공훈록에는 최학길이라는 이름으로는 강원도 양양 출생의 유공자만 등록이 되어있고, 김천 출신의 구재 최학길 선생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추모비에 초명이 최익길로 있어서 공훈록을 검색하니 나오고, 최학광이 이명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맞는 주소는 경북 김천시 조마면 신안4리 632-2 남애정(정각) 이었다.
애국지사 구재 최학길 선생 추모비
사는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려운 삶을 겪은 항일애국지사의 한 분이 구재 최학길 선생이시다. 선생의 초명은 익길이며 자는 자는 자적 별호는 주산 관향은 화순이다. 고려 홍건적란에 절사한 충절공 영유와 조선 무신란에 창의순국한 지재공 동규의 후예요. 효자 기은공 하대의 현손이며 교육자 남애노사 창락의 차남으로 1862년 1월 2일 금릉군 현 김천시 조마면 안서리에서 태어났다. 자라며 충효가의 가풍에 혼이 젖고 당대의 큰 스승 허전 장복추 이종기 문하에 나아가 선비 도를 익혔으며 한 시대의 지사들과 사귀어 의로를 지향하였다. 7세에 어버이를 위하여 익은과일을 주으러 다녔고 10대에는 노출된 해골을 묻어주고 제문을 지었으며 굶주려 동사 직전인 어린거지에게 입었던 옷을 벗어주기도 하였다. 27세에는 과거보고 오던 중 상원의 이의중이 전염병을 앓자 지닌 물건을 팔아 숙박비와 치료비로 주고 이레나 합숙하며 극력구호하여 목숨을 구하였다. 41세에도 일가 9인이 살인옥사에 연루되어 8개월째 구금된 인동의 금사과가 구원을 간청함에 생면부지였으나 백방으로 변호하여 끝내 무죄 방면토록 하니 의인이라 칭송되었다. 43세에 음보로 내부원외랑이 되니 어떤이가 더
높은 벼슬을 살 수 있다 하자 임금을 섬기려 하며 임금을 속이는 일은 선세에도 있지 않았다고 엄히 물리쳤다. 국운이 기울던 1905년 가을에는 선비 5백여 인과 연명상소하여 망국의 병폐는 인재등용의 실책과 탐관오리의 사욕이 자초한 결과라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거듭 상소하되 강화하여 왜적을 영접한 5적신의 죄상을 폭로 비판하니 붓끝에 서릿발이 섰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며 한강에 피눈물을 뿌렸다. 고종 승하에 남 먼저 상복을 입고 자제들과 망곡하자 곁에서 안위를 걱정하매 우리 임금님 위한 일이라 죽더라도 여한은 없다 하고 곧바로 향교에 통문하여 곡반의 거행을 촉구하였다. 이로써 선생은 왜경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으나 기미독립운동에 동참하여 곽종석 장석영 송준필 등의 유림대표 137인과 연명으로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대의로 국맥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지들이 체포 구금되자 선생은 광호로 자처하고 산야를 떠돌며 삼천리를 가도 한가한 땅은 없고 육십 생애에 죄 지은 몸 뿐이라 호곡하였다. 삼사년을 숨어 살다 귀가하여서는 성심으로 선업을 잇고 사의로써 후진을 이끌되 대한인으로 떳떳하라 타일렀다. 선생의 가슴은 망국민의 한과 적개심으로 가득차서 갑연을 베풀려는 자제들을 꾸짖어 포로된 몸 살아 있음도 부끄럽다 하였고 단발령이 내리자 보발설을 지어 맞섰다. 1935년 편찬한 금릉속지 발문에서도 왕풍이 사라진 옛 고을일망정 향사까지야 어찌 한가지로 묻어 전함이 없게 하랴 하였으니 비록 국권은 빼앗겼으나 결코 민족혼은 빼앗길 수 없다는 노지사의 광복염원에서였다. 이해에 총독부의 의례준칙에 3년상과 4대봉사 단축설이 발표되자 중병에도 분연히 일어나 총독부에 보낼 준엄한 반대성명을 작성함에 추호도 용서하는 기색이 없자 곁에서 또 염려하니 선비의 가슴에 춘추대의를 품은 자가 인륜이 끊어져 금수가 되는 지경을 당하고도 화가 두려워서 말 한 마디 못하는 게 옳단 말인가. 크게 꾸짖고는 남을 시켜 우송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 차례나 일경의 갖은 협박에 위태로웠으나 선생은 저를 보기를 모기떼 같이 여기었고 죽을 자리를 얻었노라 공언하는 지사의 단심을 저들도 감히 꺽을 수 없었다. 1936년 11월 총독부가 조선력을 폐지하자 우리 역사를 적을 달력조차 없어졌다. 통분하여 병이 더욱 악화되니 선생은 자만시를 지어 살아서도
죽어서도 갈 곳 없는 이 땅에 인간 세상 굽어보며 울다가 노래하네 라 읊고 국권회복에의 한을 품은 채 동년 12월 20일에 영면하니 향년 75세였다. 조선남아로 태어나 항일애국지사로 생을 마친 선생에게 광복 50주년만에 독립유공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니 죽음없는 충혼이 드디어 의기를 세움이었다. 충효가에서 태어나 선비로 입신하여 애국지사로 완명한 거룩한 선생의 삶 선생 가신 지 일흔 세 해가 되는 오늘 후손과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가 보훈사업비로 국비 및 경상북도와 김천시의 보조금을 받아 기산 남애정 앞에 전 시민의 뜻을 모아 만대의 거울로 이 비를 세운다.

단기 4341년(서기 2008년) 10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