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19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오로지 항일 일념으로 구국에 몸바쳐 조국 광복의 초석이 된 선생의 충성을 기리고 후세 귀감으로 삼고자 김천여자중학교 유만식(俞萬植) 교장과 유족 중렬(重烈)의 발의로 김천시 금릉군의 출연과 재렬(在烈)을 비롯한 종친의 협찬을 얻어 시군민의 이름으로 여기 비를 세운다.
서기 1980년 광복절
김천문화원장 송재성 주관 / 김천문우회장 윤사섭 글을 짓고 성산(星山) 전장억 쓰다.
서기 1980년 광복절
김천문화원장 송재성 주관 / 김천문우회장 윤사섭 글을 짓고 성산(星山) 전장억 쓰다.
의사 편강렬 선생 순국 기념비
편강열 순국기념비
편강열 선생의 호는 애사요, 본관은 절강이며 누대로 살던 금릉군 어모면 참나무 골에서 조부가 황해도 연백군 현죽리로 옮김에 1892년 그곳에서 상훈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을사보호조약 체결후 항일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선생은 이강년 남도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17세에 선봉장이 되었다. 1911년 평양 숭실학교 재학시 사내총독모살사건 연루로 서대문에서 2년의 옥고 끝에 방면후 1914년 금릉군 개령면 덕촌동에서 서당을 열고 항일지사를 양육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연백에서 동지를 규합, 항일군을 조직하여 무력 항쟁을 꾀했으나, 1924년 만주 길림성에서 반역자의 밀고로 하얼빈에서 7년형을 받아 신의주에서 복역중 옥질로 보석되어 만주 안동적십자병원에서 "죽거든 만주땅에 묻고 조국 광복 전에는 국내 이장을 말라"고 유언, 1928년 12월 6일 향년 37로 순국하셨다.
편강열 선생의 호는 애사요, 본관은 절강이며 누대로 살던 금릉군 어모면 참나무 골에서 조부가 황해도 연백군 현죽리로 옮김에 1892년 그곳에서 상훈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을사보호조약 체결후 항일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선생은 이강년 남도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17세에 선봉장이 되었다. 1911년 평양 숭실학교 재학시 사내총독모살사건 연루로 서대문에서 2년의 옥고 끝에 방면후 1914년 금릉군 개령면 덕촌동에서 서당을 열고 항일지사를 양육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연백에서 동지를 규합, 항일군을 조직하여 무력 항쟁을 꾀했으나, 1924년 만주 길림성에서 반역자의 밀고로 하얼빈에서 7년형을 받아 신의주에서 복역중 옥질로 보석되어 만주 안동적십자병원에서 "죽거든 만주땅에 묻고 조국 광복 전에는 국내 이장을 말라"고 유언, 1928년 12월 6일 향년 37로 순국하셨다.
의사 편강렬 선생 순국 기념비
편강렬(片康烈) 선생의 호는 애사(愛史)요 본관은 절강인데 누대로 살던 금릉군 어모면 참나무골에서 조부가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로 옮김에 1892년 그곳에서 상훈(相薰)공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항일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선생은 이강년(李康年) 남도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17세로 선봉장이 되어 수도로 진격 중 양주에서 왜적 대군과 접전끝에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크게 부상 했다. 1911년 평양 숭실학교 재학시에는 사내(寺內)총독 모살사건 연루로 서대문에서 2년 옥고를 치뤘고 방면 후 부친이 경영하던 양진의숙(養眞義塾)에서 항일지사를 양성하다가 왜경 감시를 피해 1914년 이 고장에 내려와 개령면 덕촌동에서 서당을 열고 항일지사를 양육하는 한편 황악산 삼성암에서는 무술을 가르쳤다. 3.1운동
이 일어나자 연백으로 달려가 동지를 규합 항일군을 조직하는 한편 임시정부 연락원인 아우 덕렬(德烈)공을 상해로 밀파 국내외 연합전을 꾀하다가 이른바 구월산주비단 사건으로 1920년 해주에서 1년반 복역하고 출옥하자 곧 상경하여 박영효(朴泳孝) 김시점(金時漸) 제씨와 더불어 무력항쟁을 꾀했으나 왜경 감시로 어렵게 되자 1922년 중국으로 떠나 산해관에서 양기탁(梁起鐸) 남정(南正) 제씨의 협조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했다. 단원 7인을 이끌고 봉천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장춘에서 왜인 병원을 습격하는 등 곳곳에서 왜경을 처치하는 한편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기도 했다. 또한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제씨와 손잡고 길림성에서 광복단 외 10개 단체의 행동 통일을 위한 통일회(統一會)를 조직하고 나아가 중국내 모든 단체를 합쳐 일대 항일군을 편성하려고 동분서주하다가 김성근의 밀고로 1924년 하얼빈에서 잡혀 7년형을 받았고 반역자 김은 이범석(李範奭) 장군에게 총살 당했다. 선생은 신의주에서 복역 중 옥질로 보석되어 선천 미동병원에서 가료하다가 퇴원하고 끝내 안동적십자병원에서 「죽거든 만주땅에 묻고 조국 광복 전에는 국내 이장을 말라」고 유언 1928년 12월 6일 향년 37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만주 안동현 전강산 장군봉에 묻혔는데 광복 후 국내로 이장하려던 뜻은 이루지 못했으나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은 시조 도독(都督) 갈송공의 15세손으로 후사에 덕렬(德烈)공의 2남 충무(忠茂)를 입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