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용 순충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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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19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보도되었으므로 당시 조야인사가 선생의 충의를 감탄하였고 을사 5월에 민보국 영환씨가 선생을 대하여 선생의 고의를 감복하며 조양명봉이라고 격찬하였다. 동년 7월에 우룡택, 지용택, 이우석, 이병구와 상의 하여 일본공사관을 분쇄코자 하다가 구금되어 위력과 이해로써 유협하여도 종시 불굴항쟁타카 고문을 받아 이가 부수어지고 늑골이 세개나 부러졌다. 칠삭의 구욕을 받고 익년 정월에 출옥하니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선생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조충정공 병세, 민중정공 영환 양선생 순국 즉후에 한참정 규설을 왕방하여 명읍하시니 한참정의 말씀이 이 몸이 죽지 않코 구차히 살아있으니 조민 양공에게 수괴하다하거늘 선생이 답하시되 우리 임금이 게시니 어찌 죽는것을 귀타카하리오 기회따라 복수하자 하시고 돌아오시어 허위, 이강년 동지 2인에게 ?통하여 혜화동에 집합하여서 의병을 일으키로 결의하고 허씨는 안동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도를, 이씨는 상주를 중심으로 하여 충청도를, 선생은 금산을 중심으로 하여 전라도를 거쳐 의병장 최익현과 합세하여 모두 합께 서울로 오기를 치지혈서로 약속한바 거사즉전에 전일 상처의 협통이 다시 터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허,이,최 3선생이 순사하였음을 듣고 더울 상심되어 통세는 악화되였다. 선생은 항상 생불섬적이라 사위나귀라하여 필망수국하라라 두고보자 두고보자 구호하시다가 계축12월 24일에 장서하시었다. 아아 애석하다 금석이 어찌 선생마음보다 굳으며 산악이 어찌 선생의 충절보다 높다하리오. 선생사후 33년만에 과연 적은 망하고 조국은 광복되니 선생의
구호는 드디어 이루워졌다. 단기 4299년 병오 1월 20일 충주인 박훈씨가 선생의 계남 영항댁에서 그 문적을 발견하여 도내고명인사 제위와 공감발의하여 각기관 및 유지의 협조로 널리 醵金竪碑(갹금수비)하다.
아아 의열은 산악과 더부러 우뚝하리다. 이 위적을 새겨 삼가 후세에 전하려한다.
남은 여중룡 선생 순충 기념비 안내문(南隱 呂中龍 先生 殉忠 紀念碑 案內文)

선생의 휘는 중룡(中龍) 호는 남은(南隱) 본관은 성산(星山) - 1856년 구성면 금평리에서 출생. 1895년 국모(國母)가 시해되자 허위, 강심형, 조동석과 금산장의군(金山仗義軍)을 조직하여 항일전을 펼쳤다. 1896년부터 애국지사 133명을 규합하여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고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이등방문에 항의문을 보내고 각국 공사관에 배일 협조요청을 하였다. 정부에 배일 정책 상소(33호), 황성신문에 일제 침략에 대한 비판 논설 게재로 일경에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05년 이병구, 우용택과 일본공사관 방화 폭파기도로 피검되었으며, 이때 고문으로 치아와 늑골이 부러지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05년 민영환, 한규설, 심상훈 참정에게 나라 구할 것을 협약하였다. 1906년 허위 이강년과 전국의 병기사실행 직전 고문으로 인한 병세악화로 죽어서도 원귀되어 일제타도란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1919년 유림에서 충의(忠義)포창완의문을 내렸다. 1977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선생의 유해는 국립묘지로 모셔졌다.
1999. 6. 6
南隱 呂中龍 先生 殉忠紀念碑
(남은 여중룡 선생 순충기념비)
南隱 呂中龍 先生 殉忠紀念碑
(남은 여중룡 선생 순충기념비)
무릇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때 세록지신으로 공갈충왜명함에 지난지사 이온데 하물며 포의지사로 분의항쟁타가 순국하신 남은 여중룡 선생 휘는 중룡이오 자는 무현이라하며 경북 금릉군 구성면 금평동에 출생하시어 천성이 순정하고 학식이 고명하며 효우출가하시어 고금에 드문바이다. 고종 을미년에 일본인이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음을 듣고 분노 상경하여 낭인을 찾아 복수코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 동지 111인을 모아 충의사를 조직하여 왜적을 대항하려했으며 일본인이 러일전쟁 뒤 우리 국권침략이 나날이 혹독하되 정부가 깨닫지 못함을 통분하여 정부에 십여차 혈서를 올렸고 전 주서 강원찬등과 일사 이등 및 일군사령관 장관 곡천에게 항서를 던져 일본의 간사함을 낟낟이 저적배격하였고 각국 공사관 일본이 야만임을 폭로호소하였다. 이 사실이 황성신문에 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