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산1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계헌 선생 이공 묘도비 이수기
이 비는 1850년 이곳 상좌원에서 상생하시어 1922년에 돌아가신 이경균 선생(본관:연안 자:성오 호:계헌)의 묘도비이다. 선생께선 2010년 3월 1일 국가독립유공으로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추서하셨다. 동년 정부에서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내외분을 이장함에 따라 묘소에 세워젖던 묘도비를 그곳에 방치할 수가 없어 선생께서 평생을 살아오신 이곳 故
이 비는 1850년 이곳 상좌원에서 상생하시어 1922년에 돌아가신 이경균 선생(본관:연안 자:성오 호:계헌)의 묘도비이다. 선생께선 2010년 3월 1일 국가독립유공으로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추서하셨다. 동년 정부에서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내외분을 이장함에 따라 묘소에 세워젖던 묘도비를 그곳에 방치할 수가 없어 선생께서 평생을 살아오신 이곳 故
고향마을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비롯 선생의 묘소는 고향에 없으나마 곳곳에 남아있는 선생의 족적과 투철하신 선비 정신과 숭고한
애국심을 다음 세대에 좋은 본보기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묘비 이수비를 간단히 적어 작은 빗돌로 남긴다. 2012년 5월 19일(윤 3월 29일)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산 17 모성정 앞 계헌 이경균 선생 독립운동 사적비를 찾아왔다.
오른쪽이 계헌 이경균 선생 독립운동 사적비이고 왼쪽은 이경균 선생 유적비, 가운데는 이석균 선생 추모비이다.
계헌 연안 이선생 독립운동 사적비 -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
사부의 고장 지품천 상좌원의 조촐한 지점에 높다랗게 세워저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이면 반드시 우러러 살펴보게 되는 이 거비는 바로 국중망족의 연안계출인 계헌 이선생 휘 경균의 기적비이다. 근안컨대 선생은 이 휘 성묘의 좌리공신인 청백리 충간공 휘 숭원의 40대손인데 은덕군자로 견중되어 읍지에 실린 부군 휘 규성공과 모당이신 치성 안씨 도응공의 따님 사이에서 철묘경술년(1850)에 생탄하셨다. 어려서부터 당당한 기개와 굳건한 지조로 숭유사상의 가풍속에서 깃드려진만큼 독서에 심도하더니 마침내고헌 정래석 공과 사미헌장복추공의 문하에 종유하여 대성하였고 심고한 학행과 정의로운 윤의로 세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편 국운의 비색으로 문란해진 정치와 잦은 민우를 근심하시더니 경술국치를 당해서는 충효의가 전부이신 선생께서는 일개유생으로서 구국에 보탬이 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두문불출 우울한 나날을 보내셨다. 기미년(1919) 고종의 승하소식을 접하고는 주위의 불가복론을 아랑곳없이 아민복아왕은 천리요 민?라는 정론을펴고 자손들을 거느리고 사장으로 나아가 상복차림으로 망곡하였고 뒤이어 거국적인 기미운동이 일어나자 그에 뒤질세라 분기하여 교남일원의 유수한 유림들을 규합하여 장문의 독립청원서에 서명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항일운동에 주도적인 참여로 분주하셨다. 불행히도 장서가 향교로 우송되는 과정에서 왜경에게 탄로되어 같이 서명한 인사들이 속속 체포되었고 그 와중에서 후사의 수습이며 재거를 당부하는 동료들의 간곡한 청으로 부득이 은둔하여 가까스로 옥고는 면하였으나 유사시마다 예비검속을 당하며 생불여사한 무국의 세월을 보내시더니 임술년(1922) 망국의 한을 품은 채 향년 72세로 연관하셨다. 선생은 영어의 처지만도 못한 만년을 보내면서도 건경덕사 중건 명례당하여 숭조상문하는 성효를 다하셨고 윤강원 성학전수 양로의례 연성문헌 등 후생을 계도하는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 오호라 전에서 입덕,입공,입언을 일러 군자삼불후라 일컬은 말은 아마도 선생같은 분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닌가 싶다. 두분의 배위 진양하씨와 남평문씨 사이에서 4남 현? 현찬 현우 현숙과 2녀 선산 김래원 김위동을 두셨고 이하 손증들 무수하기로 후창의 여망이 무한하리라. 몰후 80유여년
경신 2010에 국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으셨고 오늘날 이렇게 정민을 세워 희생을 매고 훌륭하신 사적을 천양하지만 선생의 숭고한 노고에 얼마쯤의 위안거리가 되올지 다만 후생들의 미미한 정성을 모아 천대에서나마 무한한 명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하면서 읍리장서와 서명인사들을 명기하여 후일의 증좌로 삼는 바이다.
뒤쪽에는 대전현충원 이장하기 전의 예전 묘비가 옮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