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조 표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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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 94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사 무호 월성박공 무조 표충비
일제가 국토 앗아간지 8년인 1917년 정사 7월 20일 오시 흥해 우목동 앞바다 외바위에 앉은 의관정제한 선비 그 성명 박무조 59세 뒷암벽엔 "擧其事而生 不若 蹈海而死 朝鮮逸民 朴能一(거기사이생 불약 도해이사 조선일민 박능일).")이란 19자의 유서가 붙어있었다. ?조의 파도가 핥아갔다 떠러저 바라보던 동민들이 아! 하고 소리쳤다. 우인 김진우씨가 울었다. 난데없이 번개 천둥 시퍼런 물은 여전히 출렁거렸다. 일인잠부가 건져내니 가부좌에 안색수연터라고 감탄했다. 이는 경술년에 숨어 살 동해?과 고사리 캘 수양산도 없어지자 왜민 될수야 없다하고 ?? 안동 영월을 거쳐 풍기로 전전 천신만고 유리 7년끝에 결론지은 마지막 장면이다. 아! 공은 선조 무계 유촌량
선생의 충효와 무민공의 유풍에서 자라나 족조 남서공앞에서 익힌 려말 3인의 고사와 논어의 조문도석사가의를 일이관지 실천결행한 초인이도다. 모래밭에 고장 되었던 시신은 다음해 정월 차남 기종씨 손에 거두어져 어민들이 운구 산성 옥정동에 오니 홍충신(준규)이 "조선일민 무호 박공지구"란 명정을 쓰고 신성동민이 교대하여 일경감시하에 환장되었다. 장남 기홍씨는 미국에 간다더니 국주(菊州)에서 피살된듯 자부 절강장씨는 청상무후로 공동묘지에 누웠고 기종 기택 형제는 불량선인이란 눈총과 비웃음속 풀뿌리로 연명했다. 슬프다! 조국이여! 꼬리 흔들며 ?빌기와 살기위해 무릎꿇은 무수한 훼절자야! 이런 어른 무섭지 아니한가! 지사 고혼들의 음우로 광복이 왔다. 태양같은 공의 대의는 흥해의흥 유림을 움직였고 최석구씨의 후원 기종씨의 주선으로 1945년 5월 투신지에 도해비세워 진혼하니 풍년이 들고 어획도 늘었다는 지방전설을 짓고있다. 회운이 덜됨인지 6.25와 사라호 태풍세 넘어진 무호공의 비신은 고장으로 왔다가 당지의 열망으로 되돌아갔다. 동민 원종주씨는 동해호국신이된 무호공의 도해비이니 원수 왜국을 바라다 볼수있는 명당이어야 한다며 바닷가 자기 땅을 흔쾌히 희사 중건하니 1987년 정유 2월이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추모회가 이룩되고 1990년 광복절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다. 한고 많던 손 수현은 그 달부터 모은 돈 내어노와 비 세우자하고 회장 수태씨가 불녕에게 청명하기에 기려수필 동해비문등을 참고하여 경위를
적고 명하노니
국통산하 위수북에 우뚝한 새 비 서니 님의 정충 높은 의기 일월로 밝았구나 동해 암벽 19자는 님의 자명 평생 이력 백이숙제(伯夷叔齊) 놀랠거고 노중련(魯仲連) 도 부끄리다.
충(忠) 아니면 나라없고 의(義) 아니면 겨레없다
무천과 박태앞에 님의 얼굴 영원하소서

백이와 숙제는 중국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백이와 숙제를 탓하며,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 하며 책망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게 된다. 이후,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의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

노중련은 중국 제나라 맹상군의 식객으로 어느 날 조나라를 지나다가 진나라의 100만 대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을 특유의 설득력으로 정면돌파하게 만든 사람이다.
경북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 942-1 무호 박무조 선생 표충비를 찾아왔다.
포항 흥해에 도해비가 건립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