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장환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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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영귀미면 좌운리 649
탐방로그
강원 홍천군 동면 좌운리 649 마을회관 옆 노암 허장환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해당 사적은 좌운보건진료소 앞에 자리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노암 선생 추모비 건립 성력자 방명
강원 홍천군 동면 좌운리 649 마을회관 옆 노암 허장환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동면의 옛 이름 영귀미면(永飯美面) 초대면장
노암(魯岩) 허장환 선생

1857년(철종 9년) 12월 16일 홍천군 동면 좌운리(坐雲里)에서 태어났다. 1894년 동학난이 전라도에서 일어나 이곳 좌운에서도 큰 싸움이 일어날 뻔했는데 선생께서는 관군이나 동학군이나 같은 조선사람인데 싸움을 해서야 되겠냐고 하시면서 관군을 달래어 홍천으로 내보내고 동학군에게는 기르던 소를 잡아주고 식량도 주었는데 이때 1894년 음 10월 17일경 동학군이 타고 온 말이 수십마리가 넘고 동학군은 수백명이 넘었다 한다.
동학군 일행은 잠시 이곳에서 머물다 화방 (노천2리) 진지리 고개와 부목재를 넘어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에서 관군과 큰 싸움을 하여 많은 사망자를 내며 동학군이 패하여 끝났다고 한다.
1907년 일제에 의하여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고 의병활동이 한창이었을 때에는 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가 속초리 지역에서 의병 활동 때 같이 손잡고 싸우며 군자금도 대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형까지 받았으나 선생의 능란한 말솜씨로 풀려났다고 한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이 되어 각 면마다 면장을 임명했는데 선생께서도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초대 영귀미 면장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21대왕 영조 35년(1759) 때부터 영귀미면이라 불렀는데 면장은 임명하지 않았고 한일합방이 된 이후에 일제에 의하여 면장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때 면사무소는 좌운리 지역에 두었는데 시장 옆 현 원종식씨 집터였다고 전해진다. 일제에 의하여 토지조사가 전국적으로 한창 이루어지던 시절이어서 현 동면지역 땅 측량도 일본인 측량기사들에 의하여 이때 이루어졌다. (1911~1917)좌운에 면사무소는 오래가지 못하고 행정구역직제 개편에 따라 1917년 10월 1일 영귀미면을 홍천에 동쪽이 된다하여 동면이라 개칭하고 면사무소를 속초리 현 동화중학교 자리로 옮기었다.
선생께서 면장을 내놓으신 1917년 이후에는 정계에 뜻을 끊고 가재를 정리하여 육영사업과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하는데 힘썼다.
魯岩先生 許公 章煥 追慕碑(노암선생 허공 장환 추모비)
魯岩先生 許公 章煥 追慕碑(노암선생 허공 장환 추모비)
누가 제 몸을 아낄 줄 모르리오마는 국사위급지추에 그 생명을 돌보지 않고 누가 제 집 먼저 생각할 줄 모르리오마는 세대 혼란한 때에 겨레 걱정 앞서하는 이가 잇다면 그는 곧 지사요 의인이라 하겠다. 원래 국가와 민족이 있고서야 자아가 존재하는 것이지만 국가 민족을 위하여 지사나 의인이 되는 이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여기에 일성과 같이 그 정신이 뚜렷하고 산두와 같이 그 위업이 높으신 분이 계시니 우리가 길이 추모하는 허노암 선생이 바로 그분이시다. 앞서 조선 철종 정사 12월 10일에 선생이 이 고장 홍천의 거족인 허씨 문중에서 고고의 성을 발하니 어려서부터 영오하고 간항하여 보는 이마다 타일의 대기로 일컫고 장성함에 머쳐 천인벽립의 상과 구우막회의 지를 간직하여 누구나 명당의 동○으로 여겼다. 그러나 약관으로부터 기우러가는 시운 가운데 선생의 심지는 가장 처창하고 그 진지는 자못 불우하였다. 갑오동학도가 의거를 이르켰을 때 선생은 관군측을 달래어 피차의 유혈극을 연출치 않고 1읍의 안전을 도모한 공이 컸으며 인강이 침략으로 대하가 쓰러질 당시에는 의병대장 민긍호와 손을 잡고 항일운동에 정신한 바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기우는 대하를 일주로써 지탱할 수 없음은 이세의 필연이다. 정미년 이후론은 정계에 뜻을 끊고 가재를 기우려 육영과 진휼에 힘쓰니 향곡에는 기근의 빛이 줄고 유위한 청년들이 그 문하에서 배출하였다. 그러하니 선생의 존재는 당세의 지주요 그의 교풍은 천추의 귀감이다. 여기에 선생의 비를 세움은 어찌 한 지방의 일뿐이랴. 선생의 성은 허씨, 관은 김해, 휘는 장환, 자는 덕오, 노암은 호요 벼슬은 통훈대부 의금부도사이였다. 오고가는 이여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머리를 숙일 것이다.
단기 4294년 4월 일 국립서울대학교대학원장 문학박사 이병○ 짓고 ○○생 이제선 쓰다
유족
손 종구, 증손 남식, 현손 기영 치영 창영, 종질 만신 만긍, 재종손 용구 승구 준구, 여서 남궁길, 외손 정길화, 외손 홍영기
추모위원
이제선 이익상 원동식 정성교 허영 김영태 허경선 허택선 허만직 허광선 이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