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읍 인덕리 산2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북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 산 28-1 황진박 선생 기념비를 찾아왔다.
이곳은 산동초등학교, GPS는 학교 옆 산을 가르킨다.
이곳은 산동초등학교, GPS는 학교 옆 산을 가르킨다.
학교 옆 도로변에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차를 세울 수 없고, 학교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걸어와야 한다.
월정 황진박 선생 기념비
금오산 정기가 낙동강에 떨어져 이땅에 한 의사를 나셨으니 이 분이 곧 월정 황진박 선생이다. 선생의 본관은 평해요 자는 국서이며 월정은 그의 호다. 1888년 4월 17일 선산군 이 고장에서 나시니 봉수님의 둘째 아드님이다. 1910년 조국의 주권이 무너지자 눈물을 뿌리며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약장수로 꾸미고 동지를 찾아 뒷 날의 큰 일을 위하여 각처를 두루 다녔으니 이때부터 선생의 생애는 가시밭 길이었다. 1919년 때마침 전국 곳곳에서 3.1운동이 일어나매 선생은 서울로 달려가 구국투쟁을 벌이다가 뜻한 바 있어 고향으로 돌아와 장진홍
김기용 박관영 이내성 장용희 님 외 여러 동지와 손을 잡고 지금과 같은 구국운동방법으로 국권을 찾고자 함은 백년을 기다림과 같으니 우리는 다 같이 결사대원이 되어 직접 행동으로 옮길 것을 맹세하고 먼저 그때 대구의 주요기관이던 도청 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 지점 등을 폭파하기로 뜻을 모아 김기용 님의 주선으로 화약을 구입하여 폭탄을 만든 다음 장진홍 님으로 하여금 조선은행대구지점에 던지게 하니 때는 1927년 10월 27일이다. 이로 인한 왜경의 수사망을 벗어나 자아진홍 님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한국노동자를 상대로 숙박소를 차려놓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과 구국사상을 불어넣으며 활동타가 왜경에 알려져 옥고를 치르고 계속 동지를 찾아 투쟁을 펼칠 무렵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이 있은지 2년만에 간악한 무리의 밀고로 장진홍 님과 함께 왜경에 붙잡혀 1년의 예심 및 1심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폭발물 취체 및 살인예비죄로 1년 6월의 옥고를 치를 때 뜻하지 않은 장진흥 님의 옥중 죽음이 생기자 선생은 옥내 여러 동지와 연락하여 옥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진홍 님의 죽음을 밝히려다 건조물 파괴죄로 8월의 옥고를 더 치르게 됐다. 대구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옛 동지들과 얼굴을 맞대고 구국단을 만들어 앞으로 큰 일을 꾀하려던 것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왜경에 안바 되어 여러 동지와 함께 1년 6월의 옥고를 비롯하여 전후 5년의 옥고를 치리고 많은 예비검속을 겪다가 조국광복을
못본 채 1942년 5월 27일 세상을 떠나시니 평생을 구국운동에 몸을 바쳤다. 임에 옷깃을 다시 여미고 삼가 노래를 새기노니
사직이 무너지자 붓 던지고 일어서 나라 찾고자 천하를 두루 다녀 왜적과 싸웠네.
빛나는 그 이름 황진박 선생 의로우신 그 정신 삼천만 겨레의 가슴마다 뛰는구나.
거룩하신 선생의 발자취 조각돌에 다 새기랴 두어라 자자손손 임마다 비 되리라.
서기 1967년 9월 30일
정회영은 글을 짓고 이영달은 글을 써서 월정 황선생 기념사업회는 이 비를 세우다.
사직이 무너지자 붓 던지고 일어서 나라 찾고자 천하를 두루 다녀 왜적과 싸웠네.
빛나는 그 이름 황진박 선생 의로우신 그 정신 삼천만 겨레의 가슴마다 뛰는구나.
거룩하신 선생의 발자취 조각돌에 다 새기랴 두어라 자자손손 임마다 비 되리라.
서기 1967년 9월 30일
정회영은 글을 짓고 이영달은 글을 써서 월정 황선생 기념사업회는 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