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태진 현창비(우곡면 답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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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1012-1
탐방로그
곁에는 해파 곽태진 선생의 아버지 되시는 곽종의 지사의 항일투쟁실록비와 추기비도 함께 건립되어있다. 또 이곳에서 15km 떨어진 개진면 양전리 5에도 해파 선생의 현창비가 건립되어있다.

한편 디지털고령문화대전을 포함한 인터넷 사이트에 위치 정보가 잘못 안내되어 있어 바로잡는다.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870이라고 나와있다. 하지만 해당 주소로 찾아가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지나가는 마을 주민에게 곽씨 집안의 독립유공자 비석의 위치를 물으니 마을 밖에 있다고 위치를 알려주었다. 바른 주소는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1012-1이다. 인터넷에서는 틀린 정보도 빠르게 복사가 되다보니 바로잡는 것이 시급해보인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기 1989년 월 일
한국문예진흥원장 송지영 찬
성균관 전의 현해봉 서
비건립추진위원회 건립
GPS 상의 주소는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1012-1이다.
비문에 의하면 곽종의 선생은 곽태진 선생의 부친이 되신다. 그리고 곽종의 선생은 공훈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海波 郭太珍 先生 抗日獨立運動 顯彰碑(해파 곽태진 선생 항일독립운동 현창비)
海波 郭太珍 先生 抗日獨立運動 顯彰碑
(해파 곽태진 선생 항일독립운동 현창비)
선생은 해남공 청백리 곽안방 선생의 17대손이고 강릉부사 죽재공 곽간 선생의 13대손이며 임진왜란시 의병장이신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12대 종손이다. 포산 곽씨의 세거지인 고령군 우곡면 답곡동에서 졸아 곽종의 지사의 차자로 서기 1917년 5월 18일에 출생하였다. 아호는 해파이며 명은 태진이다. 선생은 일제하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2대와 5대 국회의원에 당선 국리민복과 반공 반독재 투쟁에 헌신하였다. 일독이 3국이 구축동맹을 체결하여 미영불소중 등 병합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선생은 민족의 해방과 조국이 독립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호기라 생각하고 서기 1942년 항일 무력항쟁을 결심하여 비밀결사인 호의단을 조직하여 그 총수가 되여 성일영 도종표 서대운 성낙의 정이말 하상청 고창길 성학경 박낙구 김성용 성을룡 진기동
황갑수 김성학 정한식 정윤명 이동술 노전용 노오용 외 백 수십명의 동지 등을 규합하여 고령 청도 창녕 부산 등지에서 일제의 경찰서를 습격 무기를 탈취한 후 영남의 서남지역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하고 타 비밀단체와 접선을 시도하던 중 조직원의 밀고로 사전에 탐지되여 경남 창녕군 이방면 마수리 산곡에서 대구경찰서장 「후다미」와 고등계 주임 「호사까」가 지휘하는 대구고령량경찰서의 상당 수의 서원에 포위되여 서기 1945년 5월 12일 일경에 체포되였다. 현풍 신사 방화 혐의와 무장봉기 계획 등으로 일경의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고 선생은 일제 전시 체로 개정된 치안유지법 제 1조 국체를 변혁할 것을 계획하고 그 실천 행동이 있은 단체의 수괴에게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법 조항에 적용시켜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되여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서기 1945년 8월 15일 일왕 유인이 미영소중 등 병합국의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서 몽매에도 그리던 조국이 일제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이 되자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선생은 극적으로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이 공로로 서기 1963년 3월 1일 44회 3.1절에 국가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고 동년 10월 14일에 국가유공자 기장을 받았다. 선생은 해방이 되자 정계에 투신하여 한민당 민국당 민주당 민정당의 중진간부를 거쳐 신민당 지도위원 및 달성 고령 경산 지구당 위원장 민권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지조있는 정치가로서 조국의 민주발전에도 크게 헌신하였다. 또한 선생은 지방사업에도 진력하여 다산면 「닥기」들 제방공사 우곡면 낙동강 제방 공사 야정동 제방공사와 금천교 등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여 이를 실현하였다. 연연 수해에 시달리던 지역을 수한정식하고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를 이룩하는 등 향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항일투쟁과 향토사업 성취에 공이 많은 선생의 큰 덕을 칭송하고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