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영귀미면 성수리 산3-13
- 탐방로그
- 민병숙, 민병태의 묘를 찾기 위해 강원 홍천군 동면 성수리 산 3-13 여우고개에 왔다. 묘소를 바라본 상태에서 왼쪽에는 민병숙, 민병태 충혼비가 세워져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救國의 두 燈불(구국의 두 등불)
3.1열사 민공 형제분 실전
형의 휘는 병태요 서기 1870년 경오생이며 제의 휘는 병보으로 1873년 계유생으로 홍주군 동면 성수리에서 금부도사 휘 정식의 자로 출생하시다. 병보 차남은 광무 5년 3월 16일 자로 경상남도 관찰부 주사에 임명 장남 병태는 광무 6년 12월 16일에 중추원 의관에 임관재직중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됨에 비분하시고 계시든 중 1910년 한일합방이 오고야마니 두 형제께서는 잃어버린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충정에서 관직을 퇴임 낙향하시어 지하운동을 개시 충의 있는 동지들을 결합하여 국내에 유지들과 연락활동을 하셨다. 손병희 선생을 수반으로한 전국 내 방방곡곡이 세밀한 조직 하에 한날 한시에 거사하기로 되였는데 공의 형제는 이미 조직된 홍천지구 군민 전체를 3월 2일 지금에 속초국민학교 부근에 운집시키고 선두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는 선언문을 낭독하시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왜병은 혈안이 되여 총검을 운집한 군중에서 선두지휘하는 형제에게 발포를 하여 일시에 현장에서 순절하시니 형은 52세며 제는 49세로 일생을 마치시다. 이리하여 전국 내 수많은 순국열사들의 영호한 음덕으로 8.15의 광복을 맞아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로는 매년 3.1절 기념행사에 있어 면민 전체는 경건한 마음으로 열사의 영령에 추념제전을 봉행하여 애국정신을 강화하나 지금까지 죄송하게도
형의 휘는 병태요 서기 1870년 경오생이며 제의 휘는 병보으로 1873년 계유생으로 홍주군 동면 성수리에서 금부도사 휘 정식의 자로 출생하시다. 병보 차남은 광무 5년 3월 16일 자로 경상남도 관찰부 주사에 임명 장남 병태는 광무 6년 12월 16일에 중추원 의관에 임관재직중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됨에 비분하시고 계시든 중 1910년 한일합방이 오고야마니 두 형제께서는 잃어버린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충정에서 관직을 퇴임 낙향하시어 지하운동을 개시 충의 있는 동지들을 결합하여 국내에 유지들과 연락활동을 하셨다. 손병희 선생을 수반으로한 전국 내 방방곡곡이 세밀한 조직 하에 한날 한시에 거사하기로 되였는데 공의 형제는 이미 조직된 홍천지구 군민 전체를 3월 2일 지금에 속초국민학교 부근에 운집시키고 선두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는 선언문을 낭독하시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왜병은 혈안이 되여 총검을 운집한 군중에서 선두지휘하는 형제에게 발포를 하여 일시에 현장에서 순절하시니 형은 52세며 제는 49세로 일생을 마치시다. 이리하여 전국 내 수많은 순국열사들의 영호한 음덕으로 8.15의 광복을 맞아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로는 매년 3.1절 기념행사에 있어 면민 전체는 경건한 마음으로 열사의 영령에 추념제전을 봉행하여 애국정신을 강화하나 지금까지 죄송하게도
공동묘지에 계신 형제분을 사교진 홍주군수의 특별하신 배려로 이장 봉안하게 되니 만년 유택에 고히 잠드신 혼령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오호라. 일시에 형제분이 국가를 위하여 순국하신 일을 전 국민이 추모하여 마지않거늘 하물며 우리 유족의 비분함이야 어찌 금할 바 있겠는가. 그러므로 당시 일을 추념하여 기전하는 바이다.
서기 1985년 10월 30일 손 경덕 근식
오호라. 일시에 형제분이 국가를 위하여 순국하신 일을 전 국민이 추모하여 마지않거늘 하물며 우리 유족의 비분함이야 어찌 금할 바 있겠는가. 그러므로 당시 일을 추념하여 기전하는 바이다.
서기 1985년 10월 30일 손 경덕 근식
驪興閔公 丙肅 之墓(여흥민공 병숙 지묘)
驪興閔公 丙台 之墓(여흥민공 병태 지묘)
강원 홍천군 동면 성수리 산 3-13 여우고개 동면쪽 오른쪽에 있는 순국3.1열사 민공병숙, 병태 묘소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