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우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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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55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북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연조공원 내 수석 남형우 선생 순국기념비
수석 남형우 선생 순국기념비
독립투사 수석 남형우 선생 순국기념비
고령출신으로 1909년 비밀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활동하였으며, 1915년 대구의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충부를 결성하여 활동을 하다가, 1919년 경남 창원 등지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적극 주도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남형우(1874.7.27~1943.3.13, 1983년 건국포장) 선생의 공적을 추모하고자 건립함.
여기 조국광복을 위하여 풍찬노숙 중국대륙을 주름잡다가 병든 몸으로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에 항거하신 독립투사 한 분이 계시니 이 분이 바로 향토 고령이 낳은 수석 남형우 선생이시다. 선생은 일찌기 1874년 7월 17일 이곳 내상동에서 출생하시니 숫종 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아곡 선생의 9세손이요. 순조 때 고령현감을 지낸 석고공의 현손이며, 상실공과 오해사 여사의 차남으로 본관은 선녕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강직하여 정의감이 투철하였으며, 남을 울리고 웃기는 웅변이 있었다. 40세가 되도록 고향에서 한학을 닦으시다가 1908년 뜻한바 있어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시고 재학중에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서상일 박중화 등 동지와 항일무장투쟁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10년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전임강사로 피임되고 교수로 재직하면서 1915년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박영모 홍우일 이영국 서병룡 김규 정순영 황병기 등 동지와 조선국권회복중앙총본부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시고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차장을 거쳐 법무총장에 피임되었으며, 1920년에는 교통총장에 피임되는 등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1921년 신대한동맹단을 조직하여 단주가 되고, 부단주 신채호 동지와 박용만 이동휘 등 40여명의 단원들과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셨으며, 1922년 분열된 독립운동단체들을 결합하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수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으로 활약하셨고, 1923년 배천택 원세훈 장건상 김상덕 신성모 등 동지와 함께 활동무대를 북경으로 옮기고 항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대를 가지는 한편 1925년 배천택 한진산 우청우 서동일 서일보 김세준 등 동지와 입을 다물고 비밀을 사수하며 용기 전진 결단을 행동강령으로 하는 비밀결사 「다물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모집과 악질 친일파암살 등 단행하셨으며, 1928년 만주 할빈으로 옮겨 활동하다가 이듬해 흑룡강성으로 옮겨서 교포들의 교육과 독립정신고취에 진력하시던 중 과로와 수토병으로 생명이 위독하게되자 1931년 부득기 고향으로 돌아와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일제의 발악적인 식민지정책과 박해에 분노를 참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하시니 때는 1943년 3월 13일이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하지 여사가 있었고, 양자 기백 딸 기옥 사위 최수경 손자 중현이 있다.
오호라! 선생의 일생은 짧았어도 애국정신은 영원한 것이어서 광복된 조국에서는 빛나는 건국포장을 바치고, 이 고장 애국인사들은 선생의 높으신 뜻을 길이 받들고자 이 돌을 바치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기에 내또한 추모의 정성으로 대강 그날의 행적을 적고 노래 한 장을 바친다.
가야산 높푸르고 대가천 굽이 친다. 우리님 구국정충은 산고수장일러라.
독립투사 수석 남형우 선생 순국기념비
1909년 서상일 안희제 김동삼 등 청년 중심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상경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동교 법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15년에는 대구의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등 동지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활동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남 창원 등지에서 시위를 적극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해삼위 신한촌에서는 한족회를 근간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등 각료를 선출하였는데 그는 산업총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동년 4월에는 국권회복단에서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그는 법무차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에는 교통총장으로 전임되어 1921년 4월 사임할 때까지 일하였다. 1921년 북경의 군사통일회와 간도의 액목현회의 등에서 의견 차이로 각기 국민대표회의를 계획하게 되자 상해와 북경 사이를 왕래하며 절충한 결과 그는 국민대표회의의 주비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22년 5월에 "과거의 분규와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독립운동이 통일적 조직적으로 진행할 것"을 선언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와 병행해서 그는 배천택 서동일 등과 북경성 마사묘에서 무언실행을 행동 지침으로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다물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문제로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안창호 최창식 신익희 차이석 신 숙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이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1923년에는 다물단원 서동일을 귀국시켜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서동일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8년에는 북경에서 만주 하얼빈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흑룡강에서 사설학원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후 1930년에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수토병으로 귀국하여 고향에서 요양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담은 비저 문어지고 지게는 바람마자 뚤어졋네 잔뎡지 비도마에 압산새 왓다간다 아희야 배곱다 말고 글 일거라 1926년 북경에서 유석
선친께서 해외망명 생활중 상해에서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긴후 가족과 더불어 망국의 서러움과 고난을 격든 시절 그 당시의 심정과 사정을 읊은 시조이다. 여식 기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