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550
- 탐방로그
-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550에 위치한 최영돈 헌창비는 백농 김재열선생 헌창비와 함께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뜻을 선양하여 사표로 삼으려 하니 선생의 유풍은 산고수장하리라.
1992년 11월
1992년 11월
장로 최영돈 선생 현창비
애국지사 장로 최영돈 선생 현창비
고령출신으로 1919년 3월 24일,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모집에 호응하여 활동한 최영돈(1897.1.16~1985.1.3, 1990년 애족장) 선생의 공적을 추모하고자 건립함.
고령출신으로 1919년 3월 24일,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모집에 호응하여 활동한 최영돈(1897.1.16~1985.1.3, 1990년 애족장) 선생의 공적을 추모하고자 건립함.
1919년 3월 24일,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김태연·허철·김종수 등과 은창서의 집에서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오후 4시 기독교도들과 함께 마을 근처의 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후 일제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90대를 받았다. 그리고 1921년 2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모집에 호응하여 활동하다가, 동지 이현수가 1923년 1월 9일 자수하여 그 사실이 밝혀지자, 1월 24일 김태연과 함께 소위 제령 제 7호(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으나,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공소 유예되었으며, 그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가야산 정기 받아 주산에 이어지고 대가야 2천년의 빛나는 서운이 서려있는 이곳 지난날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시면서 산성과 왕릉을 찾으시던 발자취가 행여 남아 있을성한 명당에 평생을 민족교육과 조국광복을 위해 몸 바치신 우리 고장의 애국지사 최영돈 선생의 의로운 행적을 기리기 위해 비갈을 세우니 생전에 망국의 한을 억제하지 못하여 비분강개하며 빛나는 눈빛으로 논리를 펴시고 좌우공존의 혼란으로 민족의 장래가 암담할때는 일절함구하여 칩거하시면서 눈내린 새벽길을 창없는 모자를 깊이 쓰고 교회를 오가시던 이른바 사상가의 풍도가 새롭도다.
선생은 1897년 1월 16일 고령군 쌍림면 안화동에서 화순 최씨 가문의 세째 아드님으로 출생하여 향리에서 수학한 후 명문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준재이며 김천소재 학교교사로 5년간
선생은 1897년 1월 16일 고령군 쌍림면 안화동에서 화순 최씨 가문의 세째 아드님으로 출생하여 향리에서 수학한 후 명문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준재이며 김천소재 학교교사로 5년간
근무하시면서 교육으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드놉히고 물욕에 초탈한 성격으로 넓게 규휼하며 초연히 지조를 지키는 의인으로서 명실 사회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일제강압정치의 절정기라 드디어 민족해방과 독립자유를 절규하고 포악한 왜정에 항거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에 만세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태극기가 물결치는 3.1운동이 일어나게 되니 열혈애국청년은 교단에 머물수 없어 김천개녕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고 대표로 대구만세사건에 참여했으며 개녕에서 연일 만세를 고창하며 선도하다가 일경에 잡혀 가진 악형을 받았으며 그때의 혹독한 고문과 태형으로 말미아마 그 후유에 취욕하는 일이 많았다.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야인에 돌아가 영남지방 여러곳을 전전하며 교회 역무에 갈력하면서 기독교정신을 바탕삼아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며 상해임시정부 요인 이시영과 연결되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 전달할 뿐 아니라 국제회의 호소문 제출의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송명옥 장이석 김종수 등 유위한 애국청년들을 만주신흥무관학교에 입교주선하였고 수차에 긍한 군자금송달을 주동하다가 1922년 12월 선생과 더불어 이시영 두산장군 이현수 교회 교역자 유림대표 등 124명의 일제검거에 구속되었고 끝없는 일제의 감시와 압제에도 굴함이 없이 군자금송달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광복후는 연소일우에 거처하면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오직 기도일념으로 지나시다가 1985년 1월 3일 하늘의 부르심에 세연을 다하니 향년 89세였다. 비극의 역사속에서 겪어온 그 많은 고초와 파란을 추념할세 이 한돌에 그 높은 이념과 크나큰 사랑과 하늘을 찌르는 기백들을 다 남길 수 없음이 한이로다. 이제 선생의 애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