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열 현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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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550
탐방로그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550에 위치한 김재열 헌창비는 애국지사 장로 최영돈 선생 헌창비와 함께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백농 김재열 선생 현장비
고령출신으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정운일, 최병규 등과 함께 대구 부호 서창규에게 군자금을 수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김재열(1884.5.20~1950.3.29, 1990년 애족장) 선생의 독립정신을 추모하고자 건립함.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의 회원으로 활약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2월 대구에서 경상도 지역의 중산층 인사들이 조직한 독립군 지원단체였다. 인적 구성이나 활동에서 계몽주의적 성향을 지녔던 조선국권회복단의 인사들 중 박상진·정운일·김재열 등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동년 7월 풍기광복단과 발전적으로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이러한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을 행동강령으로 삼고, 군자금 조달에 의해 국내의 혁명기지를 확보하는 한편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함으로써 적시에 폭동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던 혁명단체였다. 그리하여 우선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는데, 이때 김재열은 정운일·최병규 등과 함께 대구 부호 서창규에게 군자금을 수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6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던 그는 출옥한 뒤에도 대한광복회가 추진한 친일파 처단 활동에 참가하여 권총을 김한종·채기중 등에게 제공함으로써 거사를 성공케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유구한 5천년의 맥을 이어온 나라를 빼앗기고 겨레가 설움 받던 일제의 질곡 아래에서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을 해방시키고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맨주먹으로 총칼에 항거하여 피눈물 얼룩진 투쟁을 하여 왔음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 비갈을 세워 우러러 받드는 김재열 선생 역시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분이시다.
선생의 휘는 재열 일명 광두요 호는 백농이시며 김녕군 시흥의 27대 세손으로 1884년 5월 20일 의봉산 정기서린 고령군 운수면 법동리제에서 아버님 정환공 어머님 은율송씨의 외아드님으로 출생하였다. 천품이 영민하고 기국이 커서 아버님 가르침 아래 약관에 칠서를 통달하여 그 기상과 학문이 탁월하였으며 나아가 신학문의 전당인 서울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에서 수학 졸업하시니 세사를 더욱 넓고 깊게 보는 능력을 갖추었다.
때에 일제폭정이 날로 심한지라 선생은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구국일념에 몰두하다가 1913년
30세에 대구에서 애국단을 결성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선생과 박상진은 다음해 가을 만주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득보관하고 1915년 1월 대구 안일암에서 서상일 윤상태 박상진 이시영 남형우 홍우일 안곽 박영모 외 30여 동지가 모여 조선국권회복단 조직하고 국내요처에 태궁 백산상회 등 사업체를 두어 경영케한 이익금과 최준명 정운일 최병규 등에 권총을 주어 서창규 등 대구 부호들에게 끈질긴 활동으로 받아낸 거금을 서상일에 전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과 신흥무관학교 군자금으로 밀송했으며 그해 7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에서 모인 생존 의병장을 비롯 채기중 장두환 황상옥 김진만 등 이백여명이 합세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원수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절대불변 일심육력한다.」는 서맹 아래 적극활동을 하던 중 1916년 9월 부호 서우순가에 침입한 단원 9명과 더불어 선생과 박상진 등이 일경에 체포된 바 7개월동안의 지독한 고문에도 조직의 비밀을 끝내 지켰으나 선생도 6월 징역형을 받고 복역 출감 후 곧 채기중 김한종에게 권총을 주어 악질관리와 변절자의 처단을 주도하는 등 끊임없는 활동을 계속하다가 밀고로 인해 광복회활동과 무기공여의 사실이 탄로되어 1918년 2월 다시 구속되고 지독한 고문과 오랜 옥고를 치루었으며 그 후도 검속이 지속되었으나 명석한 처변으로 일경을 괴롭히다가 1919년 10월 만주로 뛰어 곧 대한청연합회에 가입하고 1920년 국내활동의 소임을 맡고 잠입하여 익년 5월에는 해인사에서 「현대와 청년의 사상」이란 제하의 대강연회를 갖는 등 순회강연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다시 해외로 망명하여 그칠줄 모르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6년에 귀국 향리에서 43세의 때 늦은 결혼을 하여 가통을 이었으나 역려의 풍운을 탄 선생인지라 다시 상경하여 지하운동을 하시다가 해방을 맞이하고 그 감격을 채 누리지 못하시고 1950년 3월 29일 67세를 일기로 선화하셨으며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선생이야말로 그 고매한 인격과 깊은 학식 등 한없는 가능성을 모두 버리시고 일생을 오직 한줄기
나라와 겨레에 바친 불굴의 지사이시니 이 어찌 민족의 등불이요 고장의 자랑이 아니랴. 이제 우리의 사표로 삼고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산성 아랫목 편한곳에 수비하니 그 빛은 길이 남으리라.

1992년 11월
백농 김재열 선생 현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