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활동지(효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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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112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효현교
광복회 활동의 기폭제 배경이 된 효현교(孝峴橋)
경주시 효현동 1128 효현교 입구 우편마차 사건 현장인 효현교 광복회 결성 안내판을 찾았다.

광복회 활동의 기폭제 배경이 된 효현교(孝峴橋)
고헌 박상진 의사
조선 말기인 1884년 12월 7일 울산군 농소면 송정리(현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승지 박시규와 여강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지 100여 일 만에 백부의 양자가 되고, 4살이 되던 해에 경주 외동면 녹동으로 아사하여 성장했으며, 1898년 그의 나이 15세에 경주 최부자집의 월성최씨 영화(鉉敎의 장녀)와 혼인했다. 14세 당시 학덕이 높은 왕산 허위(애국계목 사상가, 의병장)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1902년 상경하여 정치와 병학을 배우며, 명사, 문객들과 교제하며 국제정세를 습득하였다. 1906년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신문학을 공부하였고,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었다. 1908년 산돌석이 일제의 교활한 농간에 빠져 순국하고, 스승 허위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이를 지켜본 박상진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한 후, 홍성에서 상경한 김좌진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는다. 이는 뒷날 김좌진이 광복회 부사령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 1909년 '양정의숙 법률경제과'를 졸업한 박상진은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10년 판사 등용 시험에 합격해 평양 지원에 발령까지 받았으나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이에 회의감을 느껴 결국 부임을 거부하였다. 안동현과 신의주에 여관을 설치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건설하여 재원조달과 연락 거점으로 이용하면서 만주이민사업을 추진하였다.

1913년부터 조선 국권회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에 추대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함께 활동하던 김좌진과 홍범도는 청산리대첩, 봉도동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박상진은 대한광복회 부사령(초대 이진룡, 2대 김좌진)으로 하여금 만주를 전담케하고, 8도 지부장을 임명하는 한편, 별도의 상업조직을 각지에 결성하였다. 이후 이제의 세금강탈과 금광습격, 친일부호와 조선총독의 암살, 신흥무관학교의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2월 1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년 여의 옥고끝에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현재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 박상진의사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광복회 결성
1910년대에는 국제 정세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신해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이다. 이런 정세 속에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이, 대구에서는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되었다. 풍기광복단은 의병과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 조선국권회복단은 계몽주의 인물들이 중심었다. 다시 1915년 7월 대구에서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강경 노선의 인사가 박상진계열의 인사들과 통합하여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광복회는 총사령에 박상진, 부사령에 이진룡이 선임되어 활동을 시작하지만, 이진룡의 체포로 의형제 김좌진이 그 뒤를 잇게 된다. 광복회는 국권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그 실천 방법으로 ① 부호의 의연(義捐)및 일본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 전사를 양성한다. ③ 중국.러시아 등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④ 무력이 준비되는대로 일본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광복회'는 "비밀, 폭동,암살,명령"의 4대 기본 강령을 바탕으로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 등의 조직을 확대하였다.

또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를 비롯하여 광주, 삼척, 예산, 인천 용천, 서울, 해주및 만주의 봉천과 장춘에 설립한 곡물상과 잡화상을 연락 거점으로 삼아, 친일부호들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금광, 세금수송 우편마차 등을 대상으로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군자금 조달은 순조롭지 않았고, 결국 군자금 출연을 거절하는 친일부호를 본보기로 처단하고 박상진의사 본인의 전 재산을 흔쾌히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이렇게 모은 군자금은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만주의 독립군 군자금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경상북도와 충청남도, 전라남도와 황해도에서 의열투쟁을 계속해 전개했다.
경주 세금마차 탈취
1915년 12월 24일 새벽녘, 엄동설한의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총사령 박상진으로부터 밀명을 하달받은 우재룡과 권영만은 미리 계획한 대로, 경주, 영덕, 영일군에서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운반하는 우편마차를 탈취 하기로 한다. 먼저 우재룡은 경주에서 대구로 가기 위해서는 건널 수 밖에 없는 효현교의 일부를 파괴했다. 마차가 강물로 진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준비를 마친 우재룡은 풀숲에 몸을 숨기고 추위를 온몸으로 이겨내며 우편 마차를 가다렸다. 한편 권영만은 그 전날 마부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부에게 폐병 치료를 위해 대구까지만 태워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마지못한 마부의 승낙을 얻어 겨우 마차의 짐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권영만은 계획대로 효현교에서 마차가 멈춰 서기를 기다리다가 마부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놀라 속력을 줄이자 세금 행낭을 가지고 유유히 짐칸을 빠져나와 기다리고 있던 우재룡과 함께 경주 녹동으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때 탈취한 세금의 총액은 8,700원(현재가 약 2억5천만 원 상당)이었고, 이는 출범 후 의욕에 넘치던 광복회원들에게 기폭제가 되었다.
경주시 효현동 1128 효현교 입구 우편마차 사건 현장인 효현교 광복회 결성 안내판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