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 동산리 산6-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며 이르기를 조부 묘명은 정무공 잠아 선생 증손이 찬하는 것이 뜻깊은 일이라고 하니 천학비재이나 영광스러운 일이라 어찌 불문으로 사양할 수 있으리오. 문적을 상고하여 약술하고 이에 명을 바치노니 충신의 가문에서 충절을 이어받아 나라 위해 한 목숨을 홍모 같이 여기셨네. 부호의 문벌에서 거액을 쾌척하여 오매불망 한 마음은 조국독립 이룸이라. 님은 비록 가셨으나 조국광복 이뤘으니 영명하신 선열께선 천상에서 환호하리. 동산양지 밝은 터에 송백이 울창하니 자자손손 길이길이 음덕을 누리리라.
2003년 계미 10월 하완
종손 채양 삼가짓고 쓰다.
2003년 계미 10월 하완
종손 채양 삼가짓고 쓰다.
최창호 선생의 차로 찾은 최완 선생의 묘소 입구. 최준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은 교동의 남쪽이지만 이곳은 교동의 북쪽이다.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천북면 동산리 산 6-21이다.
애국지사 경주 최공 휘 완 지묘
공의 휘는 완이요 자는 내수이며 초명은 영지이다. 시조 문창후 휘 치원 고운 선생께서 천하에 문명을 떨친 이래 명현달사와 충신 효자가 대를 이었으니 이태조 조에 사성공 휘 예는 청백으로 드러났으며 정무공 휘 진립 잠아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70노장으로 출전하여 사절하시니 청백리로 만고의 충신이라.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용산서원에 제향하니 곧 공의 11대조이시다. 10세조는 휘 동양공으로 관이 용궁현감이요. 9대조는 휘 국선공으로 참봉이요, 8대조는 휘 의기공으로 곧 교촌 직계조가 되신다. 고조의 휘는 기영공이니 진사요 증조의 휘는 세인공이니 진사이며 조의 휘는 만희공이니 진사요 고의 휘는 현식공이니 진사로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대대로 흉년에는 많은 사람들을 구휼하니 후덕한 인심이 방방곡곡에 칭송되었다. 비는 풍산류씨이다. 공은 경주 교촌에서 4형제 중 3
남으로 태어나니 총명하고 단아한 용모와 분명한 행의는 장차 큰일을 해낼 인물이라고 하였다. 한일합방의 국치를 당하여는 백형 휘 준 문파공께서 비분강개하여 簡昜(간양)학교를 세워 민족혼을 일깨우고 안희제 공과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거금의 독립자금을 조달하며 옥고를 겪고 있을 때 공은 조국독립을 위하여 한 몸을 던졌으니 충신의 가문에서 충절의 피가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알겠도다. 공은 약관에 안희제, 이원식, 남형우, 이시열, 윤병호, 서상일, 박중화 등 80여 인의 동지들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왜경에게 쫓기던 신성모, 김효석 등을 교촌의 공의 집에 숨겨두었으나 일제의 수색이 좁혀지자 백형이 장만해 준 자금과 공의 상속분 중 백석지기 전답을 팔아 거액을 마련하여 중국으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하였으며 광복 후 두 분은 정부요직을 역임하였다. 공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재무위원으로 선임되고 임시정부 조사위원과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 중 중요한 임무를 띠고 고국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1927년 정월 3일 대구에서 3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셨으니 애석하도다. 조국의 명운이 바람 앞에 등불 같은대 큰 뜻을 다 펴지 못하고 가셨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묘는 경주천 북동산 증조 비 영하이다. 광복 후 정부에서는 대통령표창을 수여하고 1990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배는 여강 이씨 능렬공의 따님으로 부덕과 부공을 겸비하였으며 1950년에 하세하니 향년 63세라. 부군과 함께 하지 못한 광복의 기쁨을 눈물로 여한을 달랬다고 한다. 묘는 합폄이며 1남 1녀를 두니 남은 림이요 여는 주이며 서는 조성직이다. 손자는 성환이요 손녀 경의 부는 김영제요 호정의 부는 권혜안이요, 옥혜의 부는 이병천이며 휘옥은 미가이다. 증손녀는 승희 미혜이며 외손은 조만희 조중희이다. 계미 국추에 공의 사손 성환보가 사료를 간추려 양을 찾아와 공의 묘표를 청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