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209
- 탐방로그
- 경상북도 경주시 노곡2리 마을 앞에 위치한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의 묘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을 당하였다. 임종시 한시 한수를 남기셨는데
"難復生此世上 幸得爲男子身 無一事成功去 靑山嘲緣水嗔"이라 하였다.
오호라 흉적이 비록 선생의 생명은 아섰으나 정신은 뺏지 못하였도다. 이 정신은 민족정기로서 합병 전 민족운동하던 선열의 열의로 전하여 기미독립운동이 되고 상해임시정부가 되고 드디어 을유광복이 되었으니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은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이 메아리 치고 있다. 선생의 위대한 사적을 한 조각 돌에 다 일일이 새길수없음은 실로 유감되는 바이나 국가민족을 위해서 순절하신 선생의 정신은 열일과 같이 영후히 빛날것이다.
"難復生此世上 幸得爲男子身 無一事成功去 靑山嘲緣水嗔"이라 하였다.
오호라 흉적이 비록 선생의 생명은 아섰으나 정신은 뺏지 못하였도다. 이 정신은 민족정기로서 합병 전 민족운동하던 선열의 열의로 전하여 기미독립운동이 되고 상해임시정부가 되고 드디어 을유광복이 되었으니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은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이 메아리 치고 있다. 선생의 위대한 사적을 한 조각 돌에 다 일일이 새길수없음은 실로 유감되는 바이나 국가민족을 위해서 순절하신 선생의 정신은 열일과 같이 영후히 빛날것이다.
이곳은 독립유공자 최준, 최완선생 경주최부자의 선산으로써 고헌 선생의 처가이다.
경북 경주시 내남면 노곡2리 백운대에 있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의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 노곡2리 마을 앞에 위치해 있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固軒(고헌) 박상진 의사의 묘
固軒(고헌) 박상진 의사는 1884년 울산 송정에서 태어나 경주 외동면 녹동에서 성장하였다. 許蔿(허위) 문하에서 수학한 뒤 1907년 양정의숙을 졸업, 신민회에서 활동 중 판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평양 지원판사부임을 거부하고 안동현과 신의주에 여관을 설치하여 항일 운동을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개설하여 재원조달과 연락거점으로 이용하면서 만주 이민사업을 추진하였다. 1913년부터 조선국권회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에 추대되었으며, 부사령(초대:이진룡, 2대:김좌진)으로 하여금 만주를 전담케 하고, 8도 지부장을 임명하는 한편 별도의 상업조직을 각지에 결성하였다. 이후 일제의 세금강탈과 금광습격, 친일 부호와 조선총독의 암살 신흥무관학교의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2월 1일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4년 여의 옥고 끝에 1921년 11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固軒(고헌) 박상진 의사는 1884년 울산 송정에서 태어나 경주 외동면 녹동에서 성장하였다. 許蔿(허위) 문하에서 수학한 뒤 1907년 양정의숙을 졸업, 신민회에서 활동 중 판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평양 지원판사부임을 거부하고 안동현과 신의주에 여관을 설치하여 항일 운동을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개설하여 재원조달과 연락거점으로 이용하면서 만주 이민사업을 추진하였다. 1913년부터 조선국권회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에 추대되었으며, 부사령(초대:이진룡, 2대:김좌진)으로 하여금 만주를 전담케 하고, 8도 지부장을 임명하는 한편 별도의 상업조직을 각지에 결성하였다. 이후 일제의 세금강탈과 금광습격, 친일 부호와 조선총독의 암살 신흥무관학교의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2월 1일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4년 여의 옥고 끝에 1921년 11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의 묘
고헌 박상진 의사는 1884년 울산 송정에서 태어나 경주 외동면 녹동에서 성장하였다. 허위문하에서 수학한 뒤 1907년 양정의숙을 졸업, 신민회에서 활동 중 판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평양지원판사부임을 거부하고 안동현과 신의주에 여관을 설치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개설하여 재원조달과 연락 거점으로 이용하면서 만주이민사업을 추진하였다. 1913년부터 조선국권회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에 추대되었으며 부사령(초대 이진룡, 2대 김좌진)으로 하여금 만주를 전담케하고, 8도 지부장을 임명하는 한편, 별도의 상업조직을 각지에 결성하였다. 이후 일제의 세금강탈과 금광습격, 친일부호와 조선총독의 암살 신흥무관학교의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2월 1일 일경에 체포되어 4년 여의 옥고 끝에 1921년 11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8년 12월
고헌 박상진 의사는 1884년 울산 송정에서 태어나 경주 외동면 녹동에서 성장하였다. 허위문하에서 수학한 뒤 1907년 양정의숙을 졸업, 신민회에서 활동 중 판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평양지원판사부임을 거부하고 안동현과 신의주에 여관을 설치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개설하여 재원조달과 연락 거점으로 이용하면서 만주이민사업을 추진하였다. 1913년부터 조선국권회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에 추대되었으며 부사령(초대 이진룡, 2대 김좌진)으로 하여금 만주를 전담케하고, 8도 지부장을 임명하는 한편, 별도의 상업조직을 각지에 결성하였다. 이후 일제의 세금강탈과 금광습격, 친일부호와 조선총독의 암살 신흥무관학교의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2월 1일 일경에 체포되어 4년 여의 옥고 끝에 1921년 11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8년 12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묘
의사의 성은 밀양박씨요 휘는 상진이오 호는 고헌이라 하셨다. 서기 1884년 12월 6일 울사시 송정동에서 승지 시규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백부 홍문교리 시용에게 출계하셨다. 자유시로 자질이 영명하여 세인의 흠애를 받았으며 한학에 독공하여 고대 위인열사의 사적을 애독하셨다.당시 참찬 허위 왕산 선생에게 정치 병학등을 수학하시고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학을 전공학셨다. 27세에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지법판사로 발령되었으나 한일합방 즉전 국정을 통찰하시고 부임을 거부하고 허위 왕산 선생이 의거하시매 금 오만원을 의거자금조제출하시고 허위선생이 순국하신 후 사체를 향산에 반장하셨다. 서기 1905년 왜적이 강제로 오조약을 성립시키매 크게 분개하여 친일원흉을 박멸할 계획으로 중국외교관 번종례를 따라 천진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여 이재명, 송병직을 시켜 이완용, 송병준을 암살하려다가 성사치 못하였다. 기후 중국 각지를 시찰하시고 독립운동에 전력하여 허왕산 선생 가족 및 각지에 있는 의열용사를 규합하여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만주 안동현과 신의주
에 여관과 상점을 설치하여 의군부 간부이던 신채호, 양기탁, 이윤재, 김좌진, 손일민, 제씨에게 국내외 연락기관사무를 맞기시고 이시영, 김대락, 이상용, 제씨와 협의하여 남만주 길림성 이차구와 북만주 대덕장에 군관학교를 설립하셨다. 서기 1912년 대구에서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을 정하였다. 서기 1913년 14년 양년은 수차 중국에 가서 왜적의 침략과 한국독립에 대한 사관양성을 호소하고 손중산 선생에게 황포군관학교내에 한국군 교육부를 설피하여 주기를 간청하여 승낙을 얻고 동삼성장 장작림을 누차 방문하여 한국군 군사기지 사용승낙을 받고 노백린, 홍범도에게 군사참모와 총장을 위탁하였다. 서기 1915년 가을 대구 달성공원에서 시회를 가칭하고 구 한국의병장령 기타 애국지사 수백 명을 회홥하여 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직에 추대되었다. 회규는 총군사식으로 제정되었으며 8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에는 본 회와 유사한 기구를 설치하고 본회의 부사령이 전담하기로 하였으며 초에 이석대 씨가 부사령에 임명되었다가 순사 후 김좌진이 후임하였는데 김좌진과 박의사는 의형제간이였다. 광복회는 독립자금모집과 군관양성을 획책하고 일인고관 암살및 친일반역분자 처단을 계속하여 무력으로서 국난회복을 도모함을 주목적으로 하였다. 서기 1916년 중국 상해에 가서 무기를 다수 구입하고 귀로 만주 각지에서 동지요인과 협의하여 5인조 결사대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귀국 후 총포대약법위반죄로 검거되여 김좌진, 정운일, 최준명, 김진우, 최병규, 정인영, 홍우일, 제씨와 함께 6개월 만에 출감하셨다. 그 후 더욱 일치단결하여 군자금 모집과 반역자 처단을 계속하는 동시에 동지 우재용, 권녕만씨로 하여금 경주 광명리 노상에서 대구로 수송하는 영덕 영일 경주 3군 세금 8700원을 압수하여 군자금에 충당하고 일변 친일이적자들을 동지 채기중, 금한종, 유창순, 장두환, 제씨를 시켜 처단하고 광복운동을 계속하던 중 불행히 서기 1917년 12월 20일 광복회의 비밀이 탄로되어 왜경 수백 명에게 포위 검거되어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동지 수천 명이 관련 체포되었으나 선생은 총책임을 단독부담하시고 서울과 대구로 이감되어 만 4년간 혹독한 악형을 당하시다가 서기 1921년 8월 11일 향년 38세를 일기로 동지 김한종, 채기중씨와 함께 원통하게 교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