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
- 탐방로그
-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독립유공자 최준선생의 생가이다. 동생인 최완 선생의 생가는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둔차(鈍次)'는 최준의 부친 최현식의 아호로,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육연(六然 - 자신을 기키는 지침 -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 평온할 때에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유사감연(有事敢然) :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득의담연(得意淡然) : 성공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패했을 때에는 태연히 행동하라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 평온할 때에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유사감연(有事敢然) :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득의담연(得意淡然) : 성공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패했을 때에는 태연히 행동하라
육훈(六訓) -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경주시 교동 경주 최부자 독립유공자 최준, 최완 선생 생가를 찾았다.
경북 경주시 교동 68, 69에 있는 경주 최부자 독립유공자 최준, 최완 선생 생가를 찾았다.
경주 최부자댁은 조국 광복을 위한 군자금을 제공한 독립유공자의 집안이자, 대한광복회 박상진 의사의 처가이기도 하다.
독립유공자 최준(崔俊)선생 생가
문파 최준(1884~1970) 선생은 이른바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 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문파 최준(1884~1970) 선생은 이른바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 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독립유공자 최준(崔俊)선생 생가
문파 최준(1884~1970) 선생은 이른바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 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문파 최준(1884~1970) 선생은 이른바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 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
이 가옥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ㅡ'자 모양이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이 가옥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ㅡ'자 모양이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龍庵古宅(용암고택), 大愚軒(대우헌)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忠과 義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다.
'대우헌(大愚軒)'은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의 아호로 크게 어리석다는 '대우(大愚)'에서 따온 것이라고한다.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忠과 義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다.
'대우헌(大愚軒)'은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의 아호로 크게 어리석다는 '대우(大愚)'에서 따온 것이라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