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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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5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義士 一川 鄭守基 先生 紀念碑(의사 일천 정수기 선생 기념비)
義士 一川 鄭守基 先生 紀念碑(의사 일천 정수기 선생 기념비)
의사의 성은 정이오 휘는 수기오 자는 내익이오 호는 일천이니 오천인이라. 영양공 총명의 후로 영천에 세거하다가 사정공 사순이 경주선동으로 복거하였다. 고종 병신 4월 14일에 성필의 차남으로 출생하니 어릴때부터 명민과감하니 재지초인하여 학업을 연마함에 있어서 ○○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경술국치 후에 민족의 울분은 드디어 기미운동으로 폭발되어 봉기하는 독립의 함성은 포악한 왜정의 탄압으로도 이를 저지하지 못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서 중국에 있는 교포가 호응하였고 국내에서도 계속되는 만세소리가 방방곡곡에 파급되어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에 급급하였다. 경북을 중심으로한 유림은 파리평화호의에 독립탄원서 세칭 파리장서를 제출하게 되어서 대표로 심산 김창숙이 상해에 건너갔다. 선생은 20대의 청년으로 혈기방강하고 지모○○이 출륜하여 안연히 좌시할 수 없어서 26세 되는 신유년에 자가에서 변출한 거액의 돈을 가지고 장도에 올랐다. 이홍석 주선으로
만주 율무역을 위장한 여권을 얻어가지고 북경에 들어가서 심산과 초대면하였는데 심산은 일견하고 지기로 알았다. 동거 반년에 해외투쟁과 중국사정도 알았다, 그때 임정은 로서아정부로부터 200만원의 차관이 약속되어서 우선받은 30만원을 가지고 중국에 있는 독립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자는데 대하여 일천과 심산은 그것보다도 송화강 연안 및 장가구 부근에 있는 황무지 백만평을 개척하여서 교포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고 청년훈련을 시켜서 둔전병제도를 모방하여 서서히 운동을 전개함이 좋은 방책이라고 이 회의에 반대 불참하였다. 북경을 떠나 국내에 도라와서 지기를 규합하여 유림부호를 상대로 개간비 20만원 모금에 착수하였다. 손후익 이종음 송영우 김화직 등과 같이 안동 봉화 영주 성주 울산 양산 동래 등지에서 모금을 하였다. 선생은 재정부장책으로 회유 혹은 권총으로 위협하여 600원이란 거액을 모금하여 심산에게 수교하였다 이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서 심산은 상해에서 체포되고 동지들이 속속 검거되었다. 선생은 자택에서 1년여를 은거하다가 다시 해외로 도피차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평북 백마역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안동현을 거처 봉천까지 가서 천애 이역에서 ○○풍상을 다하고 국내에 돌아오자 즉시 체포되어서 왜경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중에서 발병하여 가석방은 되었으나 거주를 대구에 제한받고 고독한 여관에서 신음하다가 병자 정월 10일에 향년 41세로 운명하니 하늘이 슬퍼하고 땅이 슬퍼하지 않었을까. 유해는 대구성 서누 누총중에서 성풍혈우 30성상을 적막하게 지내왔다. 공자의 말씀에 구생하기를 위하여 해의함이 없고 살신하여 성인함은 있다 하였으니 선생은 살신성인하였다 하여도 과언은 안일 것이다. 오천씨의 문헌을 고찰하면 영양공의 충직과 포은 선생의 대절은 수세의 귀감이라 후손에 이 의사가 났음은 실로 우연안 일이 아니고 전통적이라 하겠다. 가산을 탕진하여 독립운동에 받치고 유족들은 여지없이 영어되고 있으니 이 어찌 식자인으로서 장탄식을 금할 수 있을까. 선생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조력을 한 그의 백형 을기 족제 찬기의 희생도 잊을 수 없다. 유민에게 보낸 선생의 서중에 유비상지인연후에 유비상지사하고 유비상지사연후에 유비상지공이라 하였으니 이 편언을 보아도 그 사상 그 포부를 알 수가 있다. 오매불망하든 조국독립은 되었으나 산하반현의 비극이 가시지 않았으니 그 어찌 삼○할 바가 안일까 지방유지
○○이 선생 대의를 깊이 추모하여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기념비 건립에 제하여 관객인 유민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비록 ○○이나 정의상 이를 거절할 수 없어 평일에 보고 들은 바를 요약하여 찬술한 바이나 선생의 단충은 천추에 길이 빛날지어다
서기 1968년 무신 12월 일 영양 이유민 근찬, 진성 이관호 근서
의사 일천 정수기 선생 기념사업회 건립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에 있는 건천톨게이트 오른쪽에 있다는 의사 일천 정수기 선생 기념비를 찾아왔지만, 쉽지가 않았다.
고속도로에서 건천 톨게이트를 나올 때는 왼쪽, 고속도로로 들어갈 때에는 오른쪽이다.
의사 일천 정수기 선생 기념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33-1-21 / 소재지 : 경주시 건천읍 송선1리 (1968년 건립) / 관리자 : 건천읍사무소
정수기(1896~1936)선생은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유림의 원로 김창숙과 연락을 취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1922년 북경의 김창숙을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협의 후 1923년 국내에 돌아와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후 1927년 6월 벽옹 김창숙이 상해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으며, 선생은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동년 8월에 입국하여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어 2년 6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고문으로 인하여 불구의 몸으로 출옥을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의사 일천 정수기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선생의 고귀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려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