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내영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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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656-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방을 순회하고 함경도에 이르러 북만주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서 선생은 부득이 일경의 눈을 피해 국내를 돌며 지하운동을 벌이던 중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광복한 뒤에 건국사업에 매진하여 초대읍의원으로 선출되어 지역사회개발에 이바지하였다. 1960년 경자 4월 23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대전 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국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80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종화 차남 형화 삼남 대화가 있다. 옛말에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을 찾는다고 하였는데 충신의 집안에서 효자가 나오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이 공적비는 차남 형화가 주도하여 설립하게 되었으니 형화의 차남 연보는 나의 오랜 벗이다. 조부 죽교 선생의 생애와 공적에 대한 한글를 부탁하기에 여러 의사들의 행적과 전적을 참고하여 이 글을 짓는다. 후세에 이 비문을 읽는 사람들은 선생의 삶이 오롯이 민족의 독립에 이바지한 것에 옷깃을 여미며 경의를 표하고 아울러 귀감으로 삼기를 바란다.
동방한문연수원장 권경상 짓고 영일후인 서예가 정수암 제자 쓰고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윤만걸 세우다
길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이 마을회관이다. 공적비의 GPS 상의 주소는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656-2 이다.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팔조리 마을회관 부근 홍덕마을 독립운동가 죽교 정래영 선생 공적비를 찾아왔다.

길 건너편에 마을회관이 있다. 공적비의 GPS 상의 주소는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656-2 이다.
愛國志士 竹橋 鄭騋永 先生 功績碑 趣旨文(애국지사 죽교 정래영 선생 공적비 취지문)

애국지사 죽교 정내영 선생의 삶은 오롯이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음에 경의를 표하고 우리 후손들에게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고향인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에 세운 공적비는 차남 정형화가 주선하고 정부지원금으로 하였으며, 이 비에 새겨져 있는 지사의 독립운동은 우리 후손들에게 나라 위한 희생과 헌신을 바르게 알리고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서기 2017년 8월 일
도움 주신 분
경상북도지사 김관용, 국회의원 김석기, 경주시장 최양식, 경상북도의원 이진락, 경주시의원 엄순섭, 경주시의원 권영길, 감포읍장 최병윤, 팔조이장 강대응, 감포읍건설팀장 박진영, 노동이장 김태일
독립운동가 죽교 정래영 선생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
愛國志士 竹橋 鄭騋永 先生 功績碑(애국지사 죽교 정래영 선생 공적비)
愛國志士 竹橋 鄭騋永 先生 功績碑(애국지사 죽교 정래영 선생 공적비)
국가가 위태로울 때에 충신과 열사가 나와 민족의 지남이 되고 길이 청사에 전해져서 후세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고려가 위란하고 조선이 개국하려고 하는 때에 대부분의 고려 신하들이 조선 태조에게 충성하였으나 문충공 포은 정몽주 공은 고려의 동량이며 동국 성리학의 비조로서 일신의 영화를 마다하고 절조를 굳게 지켜 선죽교에서 유명을 달리하였기에 지금까지 충신으로 칭송하며 기리고 있다. 죽교 정래영 선생은 바로 포은공의 19세손으로 아호의 유래도 문충공의 일에 기인한 듯 하다. 예로부터 충현의 선조가 있으면 충현의 자손이 있는 것은 정리이니 선생이 걸어온 생애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선생은 우용의 아들로 광무3년 서기 1899년 기해 정월 19일 경주시 감포읍 팔조리 홍덕마을에서 출생하였으니 관향은 영일 자는 무범이며 호는 죽교이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강직 활달하였고 총명한 자질을 지녔으나 항상 면려하여 일신의 지경을 추구하였다. 어려서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여서 격물치지하는 깊은 의지에 이르렀으나 만족하지 않고 개화기를 맞이하여 신학문을 배워 민족을 깨우치고자 결심하고 상경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학문을 연마하는 한편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가슴에 품었고 정규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1919년 간악한 일제에 항거하는 기미독립항쟁이 전국에서 불길처럼 일어났을
때 선생은 약관의 나이로 분기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서울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 관헌의 무력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대구 등지의 동지들과 연락하며 재기를 모색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때에 같은 휘문의숙 출신의 김종길과 보성학교 출신의 송두환과 함께 독립운동의 연락을 위한 비밀장소로 대구 서천에 가옥을 매입하여 동료 최해규를 거주시키고 또한 신의주 노송점에 가옥을 매입하여 송협욱을 거처하게 하여 표면으로는 상업을 경영한다고 표방하면서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의 연락장소로 삼았다. 1920년 4월에 상해임시정부 및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를 적극 협력하여 민족의 독립을 도모하였다. 동년 9월에 임시정부가 단일 정부로 통합된 뒤에 군자금 모집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으로부터 의용단 위임장군 자금모집위원 사형집행서 등을 군정서 김응섭의 주선으로 위촉을 받아서 대구 정동석의 집에 숨겨두고 송두환 김종길 최해규 노기용 정두희 정두규 최윤동 등과 군사 주비단에 가담하여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동년 12월에 김종길 김명제와 상의하여 만주 봉천에서 권총 3정과 실탄 3백발을 구입한 뒤 김종규와 같이 경상남도 합천의 부호 정달낙으로부터 군자금을 수령하였다. 또 김종길과 김봉규가 의령군의 부호 남정구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다 그의 계략에 빠져 경찰에 잡혀서 연행되었는데 도중에 일경 갑비를 사살하고 한국인 순사 손기수에게 중상을 입히고 만주로 탈출한 일로 인하여 일경의 수사가 점차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군위에서 최윤동이 체포됨으로써 모든 활동의 정체가 탄로되어 선생도 여러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대구법원에서 불법무기소지와 보안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1년 6월의 선고를 받아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만기가 되어 석방되었다. 1924년 4월에 선생은 출옥한 뒤에 동지들과 연락하며 재기를 모색하였으나 국내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해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마침내 만주로 건너가서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선배 동지들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후에 북경으로 가서 배천택 김종길과 함께 의열단을 도와 일제 기관의 정보 및 일제의 앞잡이를 처단하는데 주력하며 동분서주하였다. 1926년 3월에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서 김섭응을 만나 임시정부군무부에 들어가 연락업무를 행하기 위하여 중국의 여러 곳을 왕래하였다. 1932년에 애국단의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행한 의거로 인하여 임시정부가 절강으로 옮긴 뒤에는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이때에 국내의 경계가 삼엄하여 감시를 피해 경기 및 강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