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만세공원(물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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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3
탐방로그
홍천기미만세공원에 찾아가기 위해 강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3에 왔다. 옛날의 물걸리는 지금의 홍천군 동쪽 지역의 세곡이 집결하던 동창이 설치된 곳이자, 물걸리를 흐르는 홍천강(洪川江)을 통해 세곡을 실어 나르는 조운을 겸하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이로 물걸리에는 동창마을, 동창교, 동창로와 같이 ‘동창’이 붙은 지명, 도로, 상호가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원 내에 팔열각, 순국팔열사기념비, 기미만세상, 물걸리기미만세운동기념비를 함께 발견할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기미만세운동을 기리는 글
민족의 성역 동창마을에는 우리 한민족 혼의 횃불을 밝혔던 역사의 자취가 서려있다. 제폭구민의 동학혁명이 여기에서 불붙었고 위정척사의 의병항쟁이 이 고장에서 솟아 올랐다. 나라와 겨레사랑의 뜨거운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금 동창마을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펼쳤으니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려는 비장하고 당당한 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켜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천도교 지도자인 장두 김덕원 의사 부장두 전성렬 의사가 주동이 되고 김우원 의사, 이문순 의사가 연락을 받아 기미년 4월 3일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다섯 고을에서 수천여 군중이 운집, 이곳 동창마을에서 자주독립만세를 외치는 불길이 솟았다.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한 사람도 이탈 없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웁시다" 하는 김덕원 장두의 절규에 흥분과 감격에 가득 찬 군중은 피가 끓어 넘치도록 자주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순간 간악한 왜경은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니,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연의진,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 이여선 팔열사가 흉탄에 쓰러졌고, 함춘선, 승만수 의사 등 수십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이어 체포되어 매를 맞고 고문당한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오호라! 어이 잊으리 그날의 울분을! 선열의 거룩한 뜻이 이어받은 홍청군민은 역사의 교훈이 깃든 여기에 기념상을 세워 숭고한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애국정신을 길이 후세 계승코저 한다.
1991년 8월 15일 기미만세공원건립추진위원회
이 공원은 홍천군민의 높은 뜻을 따라 제32대 군수의 주선으로 이화재단 및 군민의 성금과 金昌黙(김창묵) 회장의 헌금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1991년 8월15일

춘천교육대학교수 이길종 제작
강원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찬
강원대학교 교수 황재국 서
일광토건 대표 이완영 시공

기미만세공원 조성 추진위원회 위원장 민병성
기미만세공원 조성에 참여하여 주신 이들의 뜻을 여기에 새겨 준공을 기념하고자 한다
강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3 홍천기미만세공원을 찾아가고 있다.
동창, 만세공원, 마방터, 청로봉
이 안내판을 세운 곳이 동창만세운동 기념사업회라고 아래 쪽에 쓰여있다.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3 홍천기미만세공원을 찾았다.
기미만세공원
팔열각(八烈閣)
팔열각은 1963년 민관(民官) 합동으로 건립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퇴락하자 1990년 구성된 기미만세공원 추진위원회에서 공원 조성사업을 하면서 개보수하였다.
‘순국팔열사기념비(殉國八烈士紀念碑)’

순국 팔열사 이순극, 전영균, 전기홍, 이기선, 이여선, 연의진, 김자희, 양도준 기념비
님 그리워 울부짖든 그날에 가신 8열님을 다시 그리우며 8열얼 되새기리
서기 1963년 6월 일 이석봉
건립자 홍천군수 이석봉, 내촌면 물걸1·2리 주민 일동
팔열각 약사
물걸리 항일의거는 1919년 4월 3일 장두 김덕원의사의 주도로 5개면민(내촌, 화촌, 서석, 내면, 인제) 3,000여명이 집결하여 생명을 바쳐 항일 봉기한 역사적인 구국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민족이 해방을 쟁취할때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당시 마을대표 채희석(봉석)선생은 최택성선생의 협조로 팔열추모보국회를 기성하여 희생자 8명을 열사로 추존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현창탑을 건립키로 했다.그러나 6.25전란을 맞아 현창탑 건립은 실현되지 못하다가 1963년 팔열각건립 추진위원회를 다시 기성하고 주민의 노역과 홍천군의 지원을 받아 전성남의 설계로 건립되었다. 1966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독립운동사 제2권에 수록하고 1969년 춘천교육대학교 조동걸교수(국민대학교 대학원장)의 조사보고로 물걸리는 충절의 고장, 구국운동의 성역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991년 기미만세공원이 조성되면서 쇠락된 팔열각 건물을 철거하고 1995년 광복50주년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기획하고 김덕원의사 후손 남강 김창묵회장의 성력으로 복원되었으며 현판의 판각은 광복회장 이강훈선생의 휘호이다.
팔렬각에서

기미년 춘사월에 취의화 여덟송이 초삼일 모진 바람에 항거타가 떨어져 물걸리 동창벌을 붉은피로 물드렸네
세월은 용호천 따라 흘러 팔십여년 자유는 찾았지만 끊긴 허리 이강산 이산의 슬픔으로 가슴마다 눈물짓네
열사님 넋들 어디갔나 팔렬각만 외로워라 돌아오는 춘사월엔 취의화 다시 피어 그 향기로 통일염원 이루게 하소서

이천년 사월
역사바로찾기 연구원 부원장 김창묵 짓고
동창기미만세운동기념행사위원장 이승노 쓰다
추모 팔열사

열사는 간흉한 자를 배척하기 위해 생사를 결단하였건만
왜국이 침노하니 개탄소리에 목이 메더라.
당당한 정기는 하늘과 땅 같이 크고
경경한 정충은 해와 달 같이 밝더라.
능히 백성을 보호하였으니 초석이 되었고
역시 사직을 도왔으니 간성을 지었더라.
비록 독립은 보지 못하고 몸은 갔으나
세월은 흘러도 역사에는 영원히 이름이 있더라.
추모 팔열사

기미년 사월 삼일
만세함성 하늘을 진동했네
저 내촌천 쉬지 않음 보게나
응당 팔열사의 의로운 혼이
흐름인 것을

김교희 : 금란한시회 회장
오이환 : 대한서예원 원장
동창마을의 기미만세상

1919년 4월 3일 정오 이 고장이 배출한 천도교인 김덕원 의사가 선봉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여 천지를 진동시켰으니 이날 의거는 온누리 마을을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이게 했다.
아아 어찌 잊으라! 이날 동창마을 김덕원 의사와 함께 외친 5개 면민 수천의 피끓는 함성과 일제 헌병의 총탄에 희생된 팔열사의 충혼의 넋을....!
여기 옷깃 여미며 추모한다.

1999년 4월 3일 성균관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윤병노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의 맑고 밝은 우리 민족의 넋이 일천구백십구년 사월 삼일 강원도 홍천에서 삼일운동을 이어받아 뼈세게는 일어났었나니 그 주모자이시며 또 이곳 동학 혁명의 참가자이셨던 김덕원 의사님을 비롯해서 그 부주모자인 전성열 의사님과 일본 헌병들의 흉탄에 숨넘어가신 팔열사님들과 또 총상을 입고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른들의 넋 앞에 또 이보다 더 앞서서 순국하신 동학혁명의 이곳 열사님들의 넋 앞에 단군 할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이어받어 지키신 님들의 넋 앞에 나는 깊이 머리숙여 최고의 경의를 표하노라

예술원 원로회원 서정주 짓고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서에과교수 조용선 쓰다
물걸리 기미만세운동 기념비

민중이 그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고 싶거든 홍천군 물걸리에 와서 보아라. 삼일운동때 민중이 어떤 일을 했던가를 알고 싶거든 홍천군의 동창마을인 물걸리에 와서 물어보아라. 물걸리는 내륙지방과 동해안의 물화를 교역하는 상인과 나그네가 묵어가던 교통의 요지였다. 홍천군의 조운을 담당한 동창이 있었고 내촌면소도 여기에 있었다. 오가는 사람과 우마가 득실거리고 주막과 마방과 객주집까지 즐비하게 들어선 큰 마을이었다. 그렇게 번성하던 물걸리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물걸리만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망해가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안으로 봉건적 인습을 타파하여 근대화를 달성하고 밖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쳐 자주화하기 위하여 1994년에 전국적으로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때 홍천군의 동학농민군이 농민전쟁의 최후를 장식하였다. 물걸리에 주둔한 홍천군 동학접주 차기석이 일천여명의 농민군을 지휘하여 그해 12월 장평리에서 싸우고 풍암리 자작고개에서 마지막으로 결전할새 수삼일간 혈전 끝에 8백여명이 장렬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전사하였다. 그래도 농민들은 패배감에 빠져 실의하거나 침략자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용약재기하여 항일의병을 일으켰는가 하면 동학교를 새롭게 키우고 또 발전시켰다. 의로운 역사는 의로운 희생 위에서 꽃핀다는 교훈을 보여준 장한 모습인 것이다. 그 장한 모습이 1919년 물걸리 삼일운동을 만들어 낸 힘이 되었던 것이다. 삼일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퍼져나갈때 홍천군에서는 기독교인 중심으로 홍천읍 시위운동을 추진했고 유림들은 동면 속초리 운동을 추진했는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인들은 물걸리운동을 추진했다. 천도교인들은 상처투성이의 풍암리 전투를 회상하며 비장한 각오로 물걸리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때 전영균 양박에 모여 김덕원 장두와 전성렬 부장두의 지휘 아래 시위를 계획하고 약방의 다락에서 태극기를 만들었고 전영균 이문순은 밤낮으로 산 넘고 물 건너 이 마을 저 마을로 연락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그리고 인제군 기린면의 농민까지 수천 군중이 물걸리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전성렬의 사회로 김덕원 장두의 연설이 끝나자 이문순의 선창으로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골목마다 언덕마다 만세꾼이 가득찼는가 하면 담 위에도 지붕 위에도 그리고 내촌천 다리 위에도 만세인파가 넘실거렸으니 남녀노소가 한마음 되어 두 팔을 높이 들고 만세를 불렀다. 자유와 해방을 외쳤다. 일본제국주의여 물러가라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쌓이고 쌓였던 겨레의 울분이 폭발한 4월 3일이었다. 정의의 함성이 봇물처럼 터저나온 동창마을이었다.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하늘까지 사무치는 민중의 우렁찬 만세소리가 아니더냐. 바로 그 시각에 일본헌병과 그의 앞잡이들이 출동하여 총을 쏘았다. 맨손 맨주먹으로 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았다. 양심만으로 살아온 물걸리 백성들을 향해 이리떼 헌병들이 총을 쏜 것이다. 그리하여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김자희 연의진 이기선 전기홍 양도준이 즉사하고 함춘선 승만수 등 20여명이 부상하였다. 그리고 김덕원 전영균의 집은 불태우고 최공직의 가게집은 부수고 박살냈다. 이어 무고한 사람까지 잡아가 태형을 주고 고문하여 불구의 몸이 된 사람이 부지기수에 이르렀다. 더욱 놀랍고 무서웠던 것은 부상자들에게 약을 주고 뒷돈을 주며 간교하게도 순박한 주민들을 꾀우며 이간질하고 8열사의 거룩한 죽음을 헛되다고 선전 선동한 것이다. 그것을 일본제국주의의 회유 분열정책이라 한다. 일본 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힌 이 나라 민중이 또다시 농락을 당하고야만 것이다. 결국 이곳 물걸리는 폐허의 마을로 변하고 마방집거리의 흥청거리던 영광은 옛 이야기로 사라져갔다.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노리는 바였다. 그러나 그렇게 물러설 수는 없다. 1919년 4월 3일 물걸리에서 울러퍼진 만세소리는 민족 청사에서 영원히 메아리칠 것이오. 열사들의 죽음은 날이 갈수록 형형하게 빛날 것이다. 그 함성 그 죽음의 힘으로 이 나라가 광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불탄 재더미와 피무덤 위에서 더욱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거늘 집들이 불타고 8열사가 순국하고 식민지하에 겪어야 했던 온갖 고초를 어찌 헛되다고 말하리오. 어찌 마음까지 빼앗기겠는가. 몸은 죽어도 마음은 살아야 죽음 속에서 살아나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된다. 선열들의 정의감과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가꾸면 그 가치가 물걸리에 쏟아지게 된다. 그래야 물걸리의 영광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옛 영광을 되살리기 위하여 함께 힘을 모으자. 여기를 지나는 길손들도 발을 멈추고 물걸리의 꽃다운 역사를 찬미하자. 위대한 역사에 박수를 보내자. 그리고 고개를 숙이자.

서기 1998년 4월 3일 한국사학사학회 회장 문학박사 조동걸 삼가짓고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황재국 삼가쓰다
통일로 거두소서
김장두 덕원 의사를 추모하여

높은 산 너를 내 구비 돌아 이른 내촌
수려풍광 물걸리에 인재 또한 걸출하니
하늘이 충절의 지사 김장두를 내셨도다
일찍이 경학 수업 기개 함께 기르시어
나라 앗긴 울분에 두 주먹 불끈 쥐고
기미년 동창 궐기 앞장 서서 이끄셨다
팔열사 잃은 아픔 가슴에 품어 안고
3년간 피신 생활 광복 위한 굳은 다짐
4년 여 옥중에서도 민족혼 빛내셨다
고문 끝 실명에도 삼삼 이는 조국강산
그 강산 빛 찾았건만 남북으로 갈려 있어
님이여 뿌리신 큰 씨앗을 통일로 거두소서

1997년 5월 국립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황재국 짓고 쓰다
‘기미만세상(己未萬歲像)’
앞에 설치된 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부지 중앙에 월대(月臺)를 쌓고, 그 위에는 기미만세상이라 새겨진 기단에 팔열사를 형상화한 여덟 명이 만세를 연호하는 인물상이 장엄하게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