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상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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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17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허동상 의사는 하양후인으로서 초명은 동훈이요 자는 화중이며 호는 춘정이다. 의사는 세종조 좌의정 문경공 휘 주의 20대손으로서 충현의 후예이다. 의사의 가문을 도리켜보면 19대조인 정간공 휘 후는 단종조 계유화때에 절사하신 세종의 고명지신이고 18대조인 휘 조는 부제학으로서 단종 복위 사육신과 더불어 순절하셨으니 희대의 3세 충렬이요 진충보국의 가통을 이어온 명문이다. 허의사는 1908년 1월 6일 세거지인 경산군 하양면 부호동제에서 유학자인 휘 훤의 장남으로 출생하사 일찌기 한문 수학을 시작하였던바 16세경에는 이미 사서오경을 통달하여 총명함을 자랑하더니 후일에는 향학당 훈장으로서 몽민계유에 힘쓰시며 당시의 경국지환을 걱정하시면서 국권수호의 충도를 널리 일깨우셨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래 점심해가는 일제의
학정에 분개하신 나머지 방년 18세에는 족숙 병률 의사를 도와 애국성금을 밀모하여 상해지역을 비롯한 해외 각지 독립운동 지사에게 자금 밀송의 일역을 하시다가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갈 무렵 허의사께서는 대구학생들을 총봉기케한 계획을 세우시고 대구에 거주 중이던 문객 최한영을 설득하여 우국동지회에 많은 동지들을 입적시켜 가는데 온갖 정열을 다하셨다. 이와 같은 일을 주재해 가면서 한편으로는 야간을 이용하여 대구 시내 도처에서 토왜격문을 첩부 또는 살포하면서 대구여고보 및 대구상업 등 거시적인 학생 궐기를 도모하시던 중 왜경에 발각되어 검거 구속되었다. 만사위기임이라는 신념으로서 단독소행이었음을 강?하여 동지들을 무사 출옥케 하고 계속되어지는 옥중 투쟁과정에서 목불인견의 전기고문과 구타 등으로 이롱증을 일으키는 고초 속에도 끝내 굴함없이 버티신 결과 당시 왜인판사 송하로부터 8개월형을 받고 출옥해야 했었던 질곡을 겪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 집회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요시찰인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시위집회대열속에 잠입하여 독립만세 열창에 앞장 서셨다. 그것이 죄목이 되어 수차에 걸친 감금생활을 거듭 당하시다가 극심했던 고문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1951년 4월 8일 향년 43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의사의 공훈자료 수집 지연으로 인하여 1993년 8월 15일 광복절에 즈음해서야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이 서훈되었음에 허의사의 투철하신 애국애족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기념사업회에서는 각계의
성금으로 의사의 생졸지이며 항일투쟁정신의 발원지인 이곳에 기적비를 세우고 다음의 간략한 송가로서 의사의 뜻을 후세에 전하노라.
선혼의 어소우천혜여 호국보민의 대명이셔라. 허공의 애국진충혜여 충렬가문의 예광이로다.
위민의 만고대도혜여 이신작칙의 일로뿐이오. 허공의 불굴대지혜여 성세계민의 보경이어라.
서기 1993년 12월 일 단국대학교 교수 청풍후인 김유혁 찬, 광주후인 노재환 서
춘정 허동상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국회의원 이영창
동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 군수 최희욱
위원 채광락 전수봉 박순태 정문원 김상환 김수영 이장희 정기열 이용수 박규성 이송한 오세하
춘정 허동상 의사 기적비春庭 許東相 義士 紀績碑(춘정 허동상 의사 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