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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203
- 탐방로그
-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203 대야성 동쪽 자락 함벽루 입구 황우산 기슭에 있는 애국지사 관암 강홍렬 비를 찾아왔다. 여러개의 비석 뒤쪽에 정성스럽게 3면으로 둘러싸인 강홍열 선생의 비석이 있었다. 비석이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 증손자의 요청에 의해 전 합천군수 강석정께서 1992년 비석 글씨에 색채를 넣고 비석 주위에 주물로 된 원장을 두르고 바닥에는 보도블록을 깔아서 정비를 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涵碧樓(함벽루)
함벽루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59호로 지정되었다. 누각은 고려시대인 1321년(충숙왕 8년) 합주 지주사가 창건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건물은 이층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5량(樑) 구조의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다. 처마의 물이 황강에 바로 떨어지는 배치로 더욱 유명하며 내부에 이황(李滉), 조식(曺植), 송시열(宋時烈)의 글이 씌어진 현판이 있다. 누각 뒤 암벽에는 ‘함벽루(涵碧樓)'라고 각자(刻字)한 글씨가 있는데, 이것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수려한 합천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59호로 지정되었다. 누각은 고려시대인 1321년(충숙왕 8년) 합주 지주사가 창건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건물은 이층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5량(樑) 구조의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다. 처마의 물이 황강에 바로 떨어지는 배치로 더욱 유명하며 내부에 이황(李滉), 조식(曺植), 송시열(宋時烈)의 글이 씌어진 현판이 있다. 누각 뒤 암벽에는 ‘함벽루(涵碧樓)'라고 각자(刻字)한 글씨가 있는데, 이것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수려한 합천
涵碧樓(함벽루)
涵碧樓(함벽루)
비석군 뒤쪽에 정성스럽게 쌓여진 강홍열 선생의 비석이 있었다.
비석이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증손자의 요청에 의해 전 합천군수 강석정께서 1992년 비석 글씨에 색채를 넣고
비석 주위에 주물로 된 원장을 두르고 바닥에는 보도블록을 깔아서 정비를 했다고 한다.
비석 주위에 주물로 된 원장을 두르고 바닥에는 보도블록을 깔아서 정비를 했다고 한다.
愛國志士 鶴巖 姜弘烈 碑(애국지사 학암 강홍렬 비)
관암 강공의 불귀하심이여 가고 남음이 무상하여 공은 없건만 함벽루에 바람 달은 머물고 연호사의 쇠북은 은은히 울어라. 이 고을 대양면 장자마을의 어려운 백성집에 태어나서 예순셋을 한 고비로 ○을 떠나기까지에 쓰러진 나라를 고쳐 세우기와 압재받는 겨레를 건지기에 ○○ 다하셨으니 학생 때 삼일운동의 참여를 비롯해서 노서아에서의 세계약소민족○자 대회 참석과 만주벌판을 거쳐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사업을 도와 의열단 군자 모금 때문의 왜정 삼년에 걸친 철창 생활 등에도 험준한 가시밭길 ○○○ 젊음과 생의 즐거움을 제물하셨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 처단 특별조사위원회 경남 조사부장으로서 민족정기를 밝히기에 이바지하셨지만 끊고 나서뎐 목숨이 눈앞에 있던 ○○은 의지를 새나라에 쏟아볼 기틀을 끝내 얻질 못한 채 외로히 가시었다. 그러나 그날 곧 ○기가 되어준 이곳 남정강 흘러가는 언덕에 아쉬운 정성들이 깎아 모신 표석의 이름되어 있으면 그 의로운 뜻은 비바람 속 이끼 그늘에 제세히 푸르러 불멸하리라.
관암 강공의 불귀하심이여 가고 남음이 무상하여 공은 없건만 함벽루에 바람 달은 머물고 연호사의 쇠북은 은은히 울어라. 이 고을 대양면 장자마을의 어려운 백성집에 태어나서 예순셋을 한 고비로 ○을 떠나기까지에 쓰러진 나라를 고쳐 세우기와 압재받는 겨레를 건지기에 ○○ 다하셨으니 학생 때 삼일운동의 참여를 비롯해서 노서아에서의 세계약소민족○자 대회 참석과 만주벌판을 거쳐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사업을 도와 의열단 군자 모금 때문의 왜정 삼년에 걸친 철창 생활 등에도 험준한 가시밭길 ○○○ 젊음과 생의 즐거움을 제물하셨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 처단 특별조사위원회 경남 조사부장으로서 민족정기를 밝히기에 이바지하셨지만 끊고 나서뎐 목숨이 눈앞에 있던 ○○은 의지를 새나라에 쏟아볼 기틀을 끝내 얻질 못한 채 외로히 가시었다. 그러나 그날 곧 ○기가 되어준 이곳 남정강 흘러가는 언덕에 아쉬운 정성들이 깎아 모신 표석의 이름되어 있으면 그 의로운 뜻은 비바람 속 이끼 그늘에 제세히 푸르러 불멸하리라.
합천 대야성(陜川 大耶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133호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이 성은 신라 서부지역의 요새로서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가,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신라와 후백제 및 고려가 각축을 벌였던 대표적인 접전지역 이었다. 642년(신라 선덕여왕 11)에는 백제의 침공으로 함락되어, 성주(城主)인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과 그 부인 [무열왕 김춘추의 딸]이 죽고 신라인 1천여 명이 포로가 된 곳이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인 920년에는 견훤(甄萱)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그 뒤 고려가 점령하였다가 다시 후백제에게 넘어가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성은 936년에 최종적으로 고려가 차지하였다.
이성은 강변을 이용해 해발 90m의 취적산(吹笛山) 정상 부분에 흙과 돌로 쌓아 올렸다.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약 3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의 동쪽 산기슭에는 642년에 이성이 백제에 함락 당할 때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신라 장수 죽죽(竹竹)을 기리는 유적비가 서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33호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이 성은 신라 서부지역의 요새로서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가,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신라와 후백제 및 고려가 각축을 벌였던 대표적인 접전지역 이었다. 642년(신라 선덕여왕 11)에는 백제의 침공으로 함락되어, 성주(城主)인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과 그 부인 [무열왕 김춘추의 딸]이 죽고 신라인 1천여 명이 포로가 된 곳이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인 920년에는 견훤(甄萱)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그 뒤 고려가 점령하였다가 다시 후백제에게 넘어가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성은 936년에 최종적으로 고려가 차지하였다.
이성은 강변을 이용해 해발 90m의 취적산(吹笛山) 정상 부분에 흙과 돌로 쌓아 올렸다.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약 3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의 동쪽 산기슭에는 642년에 이성이 백제에 함락 당할 때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신라 장수 죽죽(竹竹)을 기리는 유적비가 서 있다.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203 대야성 동쪽 자락 함벽루 입구 황우산 기슭에 있는 애국지사 관암 강홍렬 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