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306-2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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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마을 기미만세운동을 주도하신 김덕원 의사 추모비를 찾아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척야산문화수목원을 찾았다. 이 곳에는 김덕원 의사의 추모비가 총 2개 있는데, 각각 수목원 입구와 청로각 근처에 위치해있다. 수목원 입구에 있는 사적은 세로로 된 비석으로, 제 10대 최규하 대통령이 비문 내용을 지으셨다. 이 비문에 적힌 전액은 명칠 여초 김응현 선생의 휘호이고, 내용에 적힌 글씨는 강원대학교 황재국 교수님의 서체라고 한다.
(전액이란 중국 주나라 때 만들어진 서체 중 '전자'체로 비석을 새긴 것을 의미한다. 자수가 적고 쓰기가 어려워 실용으로는 쓰이지 않고 장엄한 비문이나 인장에만 부분적으로 쓰인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비의 내력
이 비는 김덕원 의사의 추모비다. 이 비문은 제 10대 최규하 대통령이 지으시고 전액은 명필(名筆) 여초 김응현 선생의 휘호이며, 비문의 글씨는 강원대학교 황재국 교수가 썼다.
1997. 8. 15.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
이 비는 김덕원 의사의 추모비다. 이 비문은 제 10대 최규하 대통령이 지으시고 전액은 명필(名筆) 여초 김응현 선생의 휘호이며, 비문의 글씨는 강원대학교 황재국 교수가 썼다.
1997. 8. 15.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
동창마을 기미만세운동 주도 김덕원 의사 추모비명 병서
김의사의 휘는 원경이요 자는 덕원이며 본관은 경주로 시조 신라대보 휘 알지의 61세손이며 라말 경순왕의 후인 조선 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계림군 시 제일공 휘 균의 20세손이다. 계림군 제3자인 증 이판 휘 이성의 후를 경파라 부르는 것은 김의사의 17대조인 6조 청백리 한성판윤 시 공호공 휘 종순(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육조에 걸쳐 청백리로 선입) 때문이며 세거지를 홍천으로 옮기게 된것은 9대조인 진사 휘 세신부터이다. 부 통정대부 휘 정준공과 모 경주최씨 사이에 1876년 11월 26일 장자로 태어난 김의사는 자유시로 한문 수학에 힘쓰는 한편 빼어난 담력과 출중한 체력을 바탕으로 같은 연배 사이에서 지도성을 보이더니 관 19세에 동학군 최후의 결전장이 된 풍암리 전투에서 선봉에 서면서 항일운동대열에 본격적으로 나서다. 마방을 운영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정보를 교환하던 김의사는 43세되던 1919년 3월 1일 처음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울려퍼진
김의사의 휘는 원경이요 자는 덕원이며 본관은 경주로 시조 신라대보 휘 알지의 61세손이며 라말 경순왕의 후인 조선 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계림군 시 제일공 휘 균의 20세손이다. 계림군 제3자인 증 이판 휘 이성의 후를 경파라 부르는 것은 김의사의 17대조인 6조 청백리 한성판윤 시 공호공 휘 종순(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육조에 걸쳐 청백리로 선입) 때문이며 세거지를 홍천으로 옮기게 된것은 9대조인 진사 휘 세신부터이다. 부 통정대부 휘 정준공과 모 경주최씨 사이에 1876년 11월 26일 장자로 태어난 김의사는 자유시로 한문 수학에 힘쓰는 한편 빼어난 담력과 출중한 체력을 바탕으로 같은 연배 사이에서 지도성을 보이더니 관 19세에 동학군 최후의 결전장이 된 풍암리 전투에서 선봉에 서면서 항일운동대열에 본격적으로 나서다. 마방을 운영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정보를 교환하던 김의사는 43세되던 1919년 3월 1일 처음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울려퍼진
독립만세 소리가 전국의 방방곡곡으로 번져 홍천에까지 파급되어오자 전성렬 등 동지들과 의론하여 은밀하게 거사계획을 세우고 4월 3일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서 내촌면 와야리 문현리 화촌면 장평리 서석면 수하리 내면 방내리 인제군 기린면 상남리 등 공식 기록상 5개 면민 수천 군중이 운집하는데 성공하다. 부장두 전성렬 의사의 개회선언 장두 김의사의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모였으니 한사람도 이탈없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웁시다라는 요지의 궐기사 이문순 지사의 만세 선창 순으로 진행되던 집회가 천지를 진동시킨 군중의 만세제창 소리로 분위기가 고조될 때 일제 관헌의 발포로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연의진 김자희 이기선
전기홍 양도준 열사 등 8인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함춘선 승만수 지사 등 20여인이 부상하였으며 그 외에 많은 분이 체포당하다. 큰 희생에 애통해 하면서 김의사는 일경의 수사망을 피하여 낮이면 척야산 아래 용호대에 있는 다락방에 은신하고 밤이면 덕원산 길을 왕래하곤 하다가 일경의 래습을 받으면 청로봉 앙천봉에 피신 풍찬노숙하면서 3년을 지났으나 선자제일 밤 제사 차 하산 도중 검거되다. 구경 김의사는 4년간의 형역을 마치고 귀향했으나 본제와 가산은 획신되었으며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양안이 실명되고 지체가 불여의하게 되어 3년을 못넘기고 여생을 중병과 고통으로 마감하였다. 성인의 의지에 이른 의로운 선비의 일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후인들의 미거로 의로운 선인들의 거적들이 묻히고마는 예가 많아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강원도민일보 춘천문화방송 홍천군이 공동으로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드디어 역사 현장의 기념구역화 및 선양사업을 펼치면서 김의사에 대한 추모비명 병서를 청하므로 늦은감은 없지 않으나 동창마을 선열들의 애국유덕을 기리고 명복을 빌면서 이에 명과 아울러 서를 지어바치다.
1997년 8월 15일 제 10대 대통령 강릉 최규하 근찬
동방연서회장 안동 김응현 전액
강원대학교 교수 평해 황재국 근서
광복 50주년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 수립
한양석재 시공 이창형 근각
동방연서회장 안동 김응현 전액
강원대학교 교수 평해 황재국 근서
광복 50주년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 수립
한양석재 시공 이창형 근각
산 정상 청로각에서 보이는 창의사 모습
동창마을 기미만세운동 주도 김덕원 의사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