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용 숭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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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상신리 산59-1
탐방로그
합천군 쌍책면 상신리 산59-1에 위치한 노기용 선생 숭모비를 찾았다. 초계면 아막리 초계고등학교 내와 뒷산에 있었던 숭모비와 묘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는 뜻에서 공의 사적을 명하노니 기사에 왈
의유아공 영탁기질 찬복의리 용력자출 조년입지 구국일념 적우임정 수령비검 지하잠행 증무영일 피재왜경 적○불실 역유사○ 수형칠재 누차피체 고흔다매 심약철석 백절불굴 내득광복 천도무출
전 충대 대학원 교수 문화 류정기 찬, 성산 이헌주 서, 선산 김영주 전
광복 후 35년 기미 10월 일 기념사업회건립 밀양 박귀동 각
애국지사 추모묘역정화사업추진 특별지원자 경상남도지사 김성주
事業推進委員(사업추진위원)
特殊 捐義金 芳名(특수 연의금 방명)
초계면 아막리 초계고등학교 내와 뒷산에 있었던 숭모비와 묘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합천군 쌍책면 상신리 산 59-1이다.
의사 우전 노기용 숭모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3-1-25 / 관리자: 문중대표
이 숭모비는 우전 노기용(盧企容: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0년 10월에 건립되었다.
노기용 선생은 1920년 송두환(宋斗煥)·최윤동(崔東胤)·김종철(金鍾喆)·정두희(鄭斗禧) 등이 주도. 조직한 비밀결사에 가입·활동하였다.
그는 정두규(鄭斗奎)·노원용(盧圓容)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1921년 8~9월 권총을 소지하고 경주(慶州) 최세림(崔世林)과 합천 조성걸(趙性傑)의 집에서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또한 1923년 음력 6월에는 이수영(李遂榮)의 집에서 최윤동과 모임을 갖고 전북 정읍군(井邑郡)에 소재한 보천교(普天敎) 본부를 습격, 교인들로부터 수금한 3만원을 탈취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와 만주의 독립 운동단체를 지원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백동희(自東熙)를 새로이 동지로 포섭하여 거사를 준비하였으며, 동년 7월 노원용과 함께 군자금 수합을 위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일경의 경계가 심하자 대전(大田)의 윤길수(尹吉洙)에게 권총을 보관시키고 있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총포 화약류단속령 시행규칙 위반, 가택침입,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義士 雨田 盧企容 崇慕碑(의사 우전 노기용 숭모비)
義士 雨田 盧企容 崇慕碑(의사 우전 노기용 숭모비)
義士 雨田 盧企容 崇慕碑(의사 우전 노기용 숭모비)
무릇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것은 정의니 그것은 사회전체의 공공복리를 위하는 대도이기 때문이다. 그 정의를 위해서 능히 그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은 의사이니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라. 의사는 반드시 국가가 난국에 당했을 때 출현하는 것이라. 우리 민족이 일제의 세력에 억압되어 있을 때 의사가 배출하였으니 우전 노공은 그 가운데 한 분이시다. 공의 휘는 기용이고 자는 성옥이며 우전은 그의 호다. 노씨의 원계는 당대에 한림학사로서 현종 천보 14년에 안록산의 난을 피해 9자를 거느리고 신라 경덕왕 14년에 동래하신 노덕의 장자인 해가 수봉한 광산을 본관으로 한 것이다. 려말에 휘 인정은 절의를 지켰고 연산때 휘 ○는 은퇴하였으니 공의 충의는 그 유래가 구원한 것이다. 고조의 휘는 준이니 호는 승옹이고 증조의 휘는 이중이니 호는 낙와며 조의 휘는 응시고 고의 휘는 수현이며 비는 안동권씨니 석의 녀로서 고종 광무 원년 정유 7월 2일 합천군 적중면 황정리 제에서 공을 생하였다. 공은 천품이 비범해서 정의감이 독포하였다. 20세에 보성학교에 입학해서 수년동안 공부하다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가서 운남군단에 있는 최윤동 장군의 연락으로 상해임시정부에 이시영 선생을 만나 관공서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중대임무를 받고 국내로 잠입해서 암약하다가 기미년 3.1운동에 가담하였다. 29세 때는 의령서에 악질 왜경인 갑배수를 사살하고 경북 사건의 주모자로서 7년간의 옥고를 겪은 뒤 새로 여러 번 체포될 때마다 악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초지를 불굴하고 지하운동으로 유리 방랑할 때 혹은 농사일 혹은 광산일에 품팔이도 하며 가진 고난을 다 겪었다. 그러니 황천이 무심치 않으시와 49세때 조국이 해방되니 그의 숙원은 성취되었다. 그때 경찰계로 들어서 오관구의 감찰서장을 지나고 경찰학교장을 거쳐 고성군수로 재임하다가 고향에서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말기에 6월 25일 동란이 발발하니 자유당 정권은 무책임하게도 부산으로 천도가 된 후에 발췌개헌 등의 처사를 감행하니 그의 불의에 분개해서 유시태 옹의 대통령 저격사건에 협조하여 법정에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정권의 적대자가 되어 다시 정계에는 나갈 수 없게 되니 대구에서 한방의업을 하였는데 계묘년 3.1절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고 만년에는 부산에 차자께로 갔어 정양하다가 을묘년 8월 6일에 향년 79세로서 서거하시니 원호청의 주최로 고향 초계면 오리정 운산에다 사회장을 하였다. 배는 정선전씨니 영귀의 녀로서 2남 2녀를 생 하였으니 장남은 재전이요 차남은 재훈이요. 여서는 장욱상 이남두다. [현 부지사] 재전의 남은 원석 성석 태석 녀는 윤만대 최상신이고 재훈의 남은 길석 홍석 욱상의 남은 병기 병국 남두의 남은 종원 종덕 종길 종관이다. 공의 중계에 민용 규용과 ○자에 ○명 재영은 공의 사업에 조력하였다. 오호라 공의 심은 고난의 종자에서는 영광의 결실이 되였으나 공의 유방는 산일되고 오직 정의지란 일소단자만 남았으니 이에서 가히 그의 백절불굴한 정의관념과 구국안민할 경세포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합천군민은 공의 사적을 기념하기 위해 숭모회를 조직하고 그 대표인 조판석 류진호 이창근의 3씨가 상경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하니 내 비록 불문하나 그의 거룩한 사업을 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