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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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일부리 916-1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운동 당시 서울에 있던 정현상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백형(伯兄)인 정현하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상경하였다. 한편 이기복도 이원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왔다. 이들은 비밀리에 면내의 유지를 규합하여 의거를 서둘렀다.
약속한 3월 18일 지정된 장소에는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정연표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군중들과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관 주재소를 포위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때 합천경찰서 경찰들이 일본인 재향군인들을 대동하고 달려와 주재소 경찰들과 힘을 합하여 주도 인물 정연표 외 수십 명을 검거하고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삼가장터 3.1만세운동
1919년 기미년 음력 2월 17일(3월 18일) 삼가 장날에 백산의 이원영, 상백의 오영근 정인호 정각규 공민호와 가회의 한필동등을 중심으로 삼가 장터에 모인 주민들이 합세한 가운데, 정연표 한필동등이 정금당(삼가면소 내 소재)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5백여 명 주민들이 함성으로 소리 높여 연창하며 삼가 시장을 누비고 주재소를 포위했다. 합천경찰서에서는 경찰과 재향군인들까지 동원하고 주재소 일경과 합세하여 무자비한 폭력으로 애국 열사들을 체포 구금하는 등 밤 8시경에 강제로 해산시켰다. 1차 독립만세 운동 후 가회의 윤병모 윤규현 최용락 윤재현 김태현 허정모 허장 김홍석과 백산의 이계엽 이상동 등은 다음 장날에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삼가 백산 상백 가회 대병 봉산 대양 용주 대의 신등 생비량 등의 유림및 유지들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거사 계획을 수립했다. 3월 23일 변용규 최영기와 백산면 주민들을 규합하여 상백면사무소(운곡리 소재)를 불 지르고, 가회 및 생비량등 인근 주민들은 농악을 울리며 행진하면서 삼가 장터로 집결하고, 상백의 공재규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오영근 진택현 정경영 정원규 정치규 등과 더불어 주민들을 규합하여 상백면사무소(평구2구 소재)로 가서 면장에게 만세 삼창을 하게하고, 전주대를 넘어뜨려 통신을 마비시킨 후 삼가 장터로 집결하는 등 3만여 명의 애국 민중들이 대거 참가한 2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혹독한 강압정치에 분연히 항거하고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이 삼가 장터네 구름처럼 모여들자, 의령 대의의 김전계 정방철과 김달희가 일제타도와 대한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사자후를 토했다. 마지막 연사인 가회의 임종봉에게 총격을 가하자, 이를 보고 분노한 주민들은 몽둥이와 낫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주재소와 면사무소, 그리고 우편소로 노도처럼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함성을 지르자, 다시 진주헌병대의 헌병과 경찰들이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주재소와 면사무소 앞마당은 피바다로 변했고, 그날의 만세소리와 함성 및 참상의 처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때가 기미년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이었다. 순국자는 공재규 윤성현 박선칠 김기범 이상현 권영규 박병규 등 40여 명이나 되고, 옥고를 치른 분은 이계엽 오영근 윤규현 정연표 최용락 정각규 공민호 한필동 등 50여 명, 부상자는 임종봉 등 150여 명으로, 경찰과 헌병에 의한 살육과 탄압해산에 의한 피해가 막대했다. 이처럼 전구에서 가장 격렬하겍 대규모로, 그리고 시기적으로 앞서 일어난 삼가 장터 만세운동은 유관순의 아우내 만세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거사였다. 모든 일에는 그 원인과 현상, 미래에 계승되는것이 있으니 삼가 장터 기미만세운동의 그 대강을 살펴보면, 가까운 원인으로 동서고금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제구주의 일본이 우리 대한제국을 강제늑탈한 후 자행한 극악무도한 헌병통치와 고종황제의 독살소식,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및 불교 기독교 천도교 댁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기미3.1만세운동고가 곽종석 김창숙 김복한 등 유림대표 137인의 파리장서사건이 있으며, 구외적 원인으로는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겱주의, 러시아혁명과 약소민족대표자회의 등이 있다. 일찍이 감가는 삼기현과 가수현을 합한 유서 깊은 고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합천군 삼가군 초계군이 통합되어 합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 삼가는 남명 조식의 고향으로 합천과 의령 등은 임진왜란 때 그의 제자인 정인홍 곽재우 등 남명학파 제자사숙인들이 경의사상을 바탕으로 한 의병창의와 눈부신 활약을 하여 국난 극복을 이룩한 중심지였다. 그러나 1623년 소위 인조반정 후 서인과 노론으로 이어지는 일당전제와 지역차별 등이 심화되자, 1728년 이를 타파하기 위한 지역민들의 봉기(소위 무신란)로 인해 반역향으로 매도되어 중앙정계에서 배제되자 지역민들의 울분과 분노는 증폭되었다. 노론의 세도정치로 망국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일어난 1862년 진주농민항쟁과 정미의병전쟁 때인 1908년 한치문 이차봉 김화숙.찬숙 등 아홉 분이 삼가에서 순국한 것, 그리고 1960년 3.15의거 등도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 분연히 일어서는 삼가의 기미만세운동과 그 훌륭한 정신적 계승으로 서로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3.1운동은 국외적으로는 반식민지 독립운동에 횃불이 되어 인도의 스와라지 운동과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예로부터 "선현과 조상의 훌륭한 정신과 업적도 제자와 후손이 뛰어나랴 그 빛을 발할 수 있다."고 했다. 광복 일주갑인 오늘 만시지탄의 감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선조들의 우국충정과 어떠한 불의의 세력에도 분연히 항거하고 정의에 앞장서서 순(殉)하는 정신을 새롭게 기리면서 자손만대로 지켜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를 새겨 세우니, 우리나라와 민족 및 동방의 등불에서 나아가 천하 만민과 세계평화의 등불이 될 것이다.
경남 합천군 삼가면 일부리 916-10 삼가장터3.1기념탑 광장

삼가장터 3.1독립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큰 3.1운동으로 3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
안창호의 '한일관계사료' 등에 의하면, 삼가 장날인 1919년 기미년 음력 2월 17일과 22일 2차례에 걸쳐 일어난 삼가장터 3.1만세운동은, 삼가 쌍백, 가회면민과 인근 지역민 30,000여 명이 참여하여, 40여명이 순국, 150여 명이 부상, 50여 명이 옥고를 치른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만세의거 중 하나로, 독립운동사에 불멸의 금자탑으로 회자되고 있다.
남명 조식의 고향인 이곳에서, 이러한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념.계승하기 위해 2003년 6월에 주민들이 '삼가장터3.1운동기념탑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5개 면민들의 성금 1억 4천만 원으로, 광복 60년인 2005년 8월 15일에 기념탑을 제막하고, 2006년 5월에 광장을 완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