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순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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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73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신원순 의사 독립운동 기념비
조국의 독립과 국권을 쟁취코자 궐기한 기미년 나라 잃은 백의민족이 절규하는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삼천리를 진동할때 뜨거운 애국의 화신 독립운동의 열혈아는 고향에서 목이 터저라 만세를 부르고 시위 군중을 지휘하다 잔학무도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 빈사의 경지에서 생사의 고비를 여러번 넘기면서도 오직 불같은 위국단심에서 감옥에서도 법정에서도 출옥해서도 독립만세를 외친 의사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신원순이요 자는 경팔 호는 농은이다. 대쪽같이 강직한 기개에다 송백같은 고절을 지냈으니 가계는 충절로 빛나는 평산 신문이었다. 님은 장절공 신숭겸의 34대손이요 명유 송계 신계성선생의 14대손이다. 이와 같이 혁혁한 충절의 명문에서 1890년 음 5월 10일 합천군 묘산면 중촌에서 탄생하셨다. 기품이 강개하고 여력이 발군하고 위의척당하여 일향의 헌헌장부로 칭송
되었다. 1919년 기미 3.1운동이 터지자 3월 15일 윤병석 윤병하 윤병교 윤병은 윤병양 장덕균 한용홍 이우필 성경술등과 모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동지 규합과 태극기 제작등을 비밀히 추진 3월 22일 오전 4시경 노루목에서 전신주를 넘겨 통신을 두절하고 오전 10시 합천군 묘산면사무소앞에서 드디어 거사하여 수백명의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이 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맨주먹 평화시위군중에 잔인한 일본 헌병대와 경관대는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거리를 붉은 피로 물들였다. 의사는 사처를 넘어 민중을 재정비 선동하여 맹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4월 29일 왜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봉산면 주재소에서 잔인혹독한 고문으로 사경을 넘음이 그 몇번이었던가 5월 4일 진주지방검찰청으로 송칟괴어 6월 27일 진주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진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당시의 박해와 신산고초가 어떠했으랴 1920년 12월 27일 출감하자마자 또 다사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재수감되어 3개월후에 출옥되었다. 의사는 모진 고문으로 인한 병든 몸으로 평생을 고통속에 요시찰인물로 감시와 질곡속에서 살아오다 1945년 감격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제의 주구 반민족분자의 숙정에 앞장섰으나 친일파정권의 탁세에서 의사는 비분을 참지 못하고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 4월 11일 장서하셨다. 그대 불굴의 조국광복투쟁으로 조국대한은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였나니 민족의 은인 의사의 독립운동이여 조국은 199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님에게 추서하였도다. 신의사여 장하도다 빛나도다 위대하도다 님의 꽃다운 이름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님의 조국광복독립에의 공헌은 길이 민족의 가슴에 남으리라.
왜놈들의 간담을 서늘케한 우렁찬 내 조국 빛난 독립 고문으로 병든 육신 이미 조국에 바쳤거니 이 겨레 통일의 앞날을 내 몸보다 더 걱정하였소 평산신문 충절 고추보다 더 맵고 님의 투혼 무쇠보다 더 굳세었고 내 조국 님의 헌신으로 광복하여 길이 아세아 동방의 빛이되리
경남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704 신원순 의사 독립운동 기념비를 찾아왔지만 주소가 잘못되어 있었다.
GPS 상의 주소는 경남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738-1 관기마을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