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596-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들이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기념비를 세우니 구천에 계실 정령에 보답하는 일들이라 하겠다. 맹권 창권이 기적비 건립추진위원장 신옥순씨와 함께 나를 찾아와 비문을 청하므로 대구사범 독립운동 동지였던 사람으로서 굳이 사양할 수 없어 이렇게 적는다.
백번을 꺽어도 굽히지 않은 공의 지조는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서기 1994년 8월 일
인천 이태길 삼가 짓고 청도 김문배 삼가 쓰다
백번을 꺽어도 굽히지 않은 공의 지조는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서기 1994년 8월 일
인천 이태길 삼가 짓고 청도 김문배 삼가 쓰다
기적비 건립 추진위원회 명단
경남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596-5 애국지사 문홍의 기적비
愛國志士 南平文公 洪義 紀績碑(애국지사 남평문공 홍의 기적비)
愛國志士 南平文公 洪義 紀績碑(애국지사 남평문공 홍의 기적비)
백설이 산야를 덮어도 송백은 푸름을 바꾸지 않고 총칼이 생명을 겨누어도 의사는 지조를 굽히지 않나니 자연은 늘푸른 나무들로 인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인류 역사는 꿋꿋한 절의에 의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감이라 저 포악한 왜제가 우리 국토를 강탈했을 때 목숨을 던져 구국의 성봉에 나선 선열들이 아니 계셨던들 조국이 어찌 광복되었으리요 우리가 이 두무산 남녁에 청석을 세워 항일애국지사 문홍의 공의 행적 일단을 새기는 뜻 또한 여기에 있다. 공의 본관은 남평이며 고려조 벽상공신 남평백 휘 다성이 시조이신데 이후로 고학과 숭덕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음은 세인이 주지하는 바 고려말 판도판서 휘 근이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남하하여 합천 대야촌에 복지하니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조선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휘 계창은 함양군수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고 벼슬이 목사에 이르렀는데 공의 14대조이다. 고조는 휘 주성이요 증조는 휘 익흠이며 조는 휘 한계이니 3대로 은덕이 있었다. 아버님은 휘 기현이요 호는 성곡이며 학문과 덕행으로 온 고을의 추앙을 받았고 어머님은 합천이씨 시보의
따님인데 현모양처로 가문의 모범이 되었다.
공은 서기 1921년 이곳 관기리 본제에서 출생하니 어릴적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어른들의 촉망을 받았고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후 피끓는 동지 학생들과 문예부 다혁당 등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기관지 반딧불과 학생 등을 발간하여 가물거리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한편 대중 속에 침투하여 조국독립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고취하다가 1941년 7월에 35명의 동지와 함께 왜경에 검거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꿋꿋이 버티다가 마침내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았고 옥중에서도 비밀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공과 동지들이 예견했던대로 일본이 패망하여 옥중에서 8.15해방을 맞았으니 그 기쁨 어디다 비기랴. 옥문이 열려 고향으로 돌아와 4년 옥고에도 아랑곳없이 교육을 통한 조국 재건에 나섰다. 모교인 묘산국민학교와 합천국교를 거쳐 대구사범부속학교에서 애국애족의 참교육에 헌신하던 중 6.25사변이 일어나 국제연합군 통역문관으로 뽑혀 종군하였는데 그해 12월 15일 38선 이북의 전투에서 실종되었다. 항일투쟁에 젊음을 바친 투사로 하여금 하늘은 어이 광복된 조국땅에서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목숨을 잃게 하였던가.
부인 조능수 여사는 본관이 창녕인데 청상의 몸으로 어린 아들 맹권 창권을 고이 길러 품팔이도 마다 않고 학비를 마련해 대학까지 진학시키다가 미처 성취도 못 보고 1971년 5월 15일 한 많은 일생을 마치니 묘소는 저 화성산 기슭 유좌이다. 이제 맹권은 회사 간부로 창권은 중견 교육자로 사회 국가에 기여하고 있으니 이 또한 공의 유덕의 소치이라.
오호라 공이 가신지 근 반세기 년전에 정부에서 공의 충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이번에 고향 인사
공은 서기 1921년 이곳 관기리 본제에서 출생하니 어릴적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어른들의 촉망을 받았고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후 피끓는 동지 학생들과 문예부 다혁당 등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기관지 반딧불과 학생 등을 발간하여 가물거리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한편 대중 속에 침투하여 조국독립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고취하다가 1941년 7월에 35명의 동지와 함께 왜경에 검거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꿋꿋이 버티다가 마침내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았고 옥중에서도 비밀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공과 동지들이 예견했던대로 일본이 패망하여 옥중에서 8.15해방을 맞았으니 그 기쁨 어디다 비기랴. 옥문이 열려 고향으로 돌아와 4년 옥고에도 아랑곳없이 교육을 통한 조국 재건에 나섰다. 모교인 묘산국민학교와 합천국교를 거쳐 대구사범부속학교에서 애국애족의 참교육에 헌신하던 중 6.25사변이 일어나 국제연합군 통역문관으로 뽑혀 종군하였는데 그해 12월 15일 38선 이북의 전투에서 실종되었다. 항일투쟁에 젊음을 바친 투사로 하여금 하늘은 어이 광복된 조국땅에서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목숨을 잃게 하였던가.
부인 조능수 여사는 본관이 창녕인데 청상의 몸으로 어린 아들 맹권 창권을 고이 길러 품팔이도 마다 않고 학비를 마련해 대학까지 진학시키다가 미처 성취도 못 보고 1971년 5월 15일 한 많은 일생을 마치니 묘소는 저 화성산 기슭 유좌이다. 이제 맹권은 회사 간부로 창권은 중견 교육자로 사회 국가에 기여하고 있으니 이 또한 공의 유덕의 소치이라.
오호라 공이 가신지 근 반세기 년전에 정부에서 공의 충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이번에 고향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