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선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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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무곡리 169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송산 이용선독립운동사략
애국지사 송산 이공 용선은 전주인 익근의 막내아들로 1882년 12월 27일 합천군 대양면 무곡리에서 태너나다. 천품이 강직고결하여 재능이 비범하여 일찍 한문을 수학하고 농사를 생업으로 삼아 안빈낙도로 청렴한 생활을 하고있던 이용선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젊은 피가 역류하고 가슴이 찢어짐을 참을길없어 향리의 열혈동지와 청년구국단을 결성 청소년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해외와 경성등지의 우국지사와 제휴하면서 조국독립운동에 혼신을 다하다 1919년 3월 1일 해외와 경성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고종활제 인산에 참예하고온 강홍렬이 독립선언문을 전달하니 민심이
일어나도다. 단원들은 은밀한 모임끝에 3월 19일 합천시일에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미리 언언서와 태극기 수백매를 만들고 각 동리 집집마다 대양면 마장에 모이도록 통지하니 3월 19일 준비된 태극기를 갖고 합천읍에 잠입하다 오후 4시 장꾼이 가장 많이 모여 들었을때 시장복판에서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소리 높에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5백여명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다. 의분에 넘친 군중의 함성은 시장거리를 누비면서 노한 사자같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이에 놀란 일경 무장대가 총검으로 威嚇(위하)하고 심재기등 17명을 구금하고 강제해산케 하였으나 17명의 앞장섰던 동지를 경찰에 두고 차마 돌아가지를 못하다 일부가 회합 20일에 구출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인근 면리에 연락하여 20일 오후 7시에 합천읍에 결집하기로 약속하고 각자 임무 수행에 들다. 경술년 국치후 총독정치에 시달림을 당하는 분함을 3월 19일 합천시일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핲장서니 출동한 일경들에게 동지들이 검거당하고 강제해산되어 돌아오니 분통함은 더욱 고조되도다. 그 다음낳 17명의 구출운동에 나서 제일 먼저 결사대에 자원하니 심맹권등 12명이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죽음을 같이 할것을 맹세하고 수백군중을 휘동하여 합천시장으로가 합세하니 오백며명이 되도다. 작동에서 참집한 군중과 합세하여 구금된 애국지사 석방요구와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읍내를 시위하고 경찰서를 포위하니 당황한 서장이 선해산 후석방을 제의해 왔으나 우리측은 선석방 후해산을 요구하다 이 요구가 관철되지않으니 극도로 격분한 군중은 결사대원을 선두로 태극기를 높이들고 노도와 같이 돌진하자 일경의 일제발포에 추용만 김영기 김호수 강시만이 순절하고 이공등 11명이 부상을 당하다 이공은 재판에 회부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2년을 언도받고 서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그후 구국단심
은 더울 타올라 원근동지들과 뜻을 모아 항거를 계속하니 크고 작은 신고는 헤아릴수없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아 펑생소업인 농업으로 소일하다 1960년 5월 29일 향년 78세로 조용히 천수를 마치다. 1980년 8월 1일 나라에서 그 공을 찬양하여 대통령표창이 추상도다. 아! 공등의 굳은 애국심의 결정으로 조국이 광복되고 민족이 소생하도다. 육신은 비록 지하에 돌라갔으나 일편단심은 길이 천상에 있으러니 그 이름 천추에 빛나리로다. 국가 유공자 묘지정화사업으로 비를 세언 그 공적을 새겨서 후인에게 전하노라.
1983년 11월 일 건립자 합천군수 구자경
합천군 대양면 무곡리 169 장지골 어귀 애국지사 이용선지사의 묘소를 찾았다.
언론에 독립유공자 묘소가 관리되지않고 있다고 나온 인터넷 뉴스를 보고서 위치를 파악할수있었다.
겨우 묘소까지 왔지만, 차를 돌릴 수 있는 지점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愛國志士李龍善之墓(애국지사 이용선지묘)